영국을 걷는다는 건 런던 등 대도시 관광과는 차원이 다르다.
호수와 계곡을 가로질러 야트막한 산을 넘는다. 싱그러운 초원과 능선을 지나고 나면 19세기 유물 같은 시골 가옥들을 만나곤 한다. 낭만파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가 사랑했던 땅이 있고<폭풍의 언덕> 속 황무지 무어랜드를 걷는 길, 영국 CTC 트레일이다.
영국은 지형적으로 한반도와 닮았다. 스코틀랜드는 휴전선 너머 북한을, 잉글랜드는 남쪽 대한민국을 연상시킨다. 섬의 허리를 서에서 동으로 횡단하는 도보 여행길이‘Coast to Coast Walk’ 약칭 CTC로 부른다. 우리나라로 치면 인천 월미도에서 강릉 정동진이나 묵호항까지 잇는 길이랄까. CTC의 가장 큰 매력은 영국 정부가 자연보호구역으로 지정한 세 개의 국립공원을 연이어 관통한다는 점이다.
잉글랜드 서부의‘레이크 디스트릭트(Lake District)’와 중부의‘요크셔 데일스(Yorkshire Dales)’ 그리고 동부의‘노스요크 무어스(North York Moors)’가 섬의 허리를 감싸며 두터운 벨트처럼 연결되어 있다. 세 지역은 저마다의 자연환경과 역사 문화가 담긴 독특한 아름다움을 품고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우리가 알게 모르게 익숙해져 있는 서구문화의 다양한 면들이 망라되어 있는 곳이 영국이고, 유럽을 지배하려던 나폴레옹과 히틀러도 정복하지 못한 땅이 영국이다. 그 섬의 가운데 허리 부분을 두 발로 뚜벅뚜벅 밟으며 횡단하는 CTC 트레킹은 유럽의 속살까지 경험하는, 영국 여행의 진수나 다름없다.
레이크 디스트릭트(Lake District) - 거리 105km 소요 기간 5일
세인트비스는 잉글랜드 북부 해안에 위치해 있다. 컴브리아주 서쪽 끝에서 아이리시해에 면해 있는 이 자그마한 어촌 마을이 영국 횡단 CTC의 출발지다. 마을 기찻길을 벗어나 해안 절벽을 넘어서면 얼마 후부터 광대한 호수 지역인 레이크 디스트릭트가 펼쳐진다.
19세기 영국의 모습을 가장 많이 간직한 곳으로 정평이 나 있다. 영국의 낭만파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는 자신의 고향인 이 지역을‘인간이 발견한 가장 사랑스러운 곳’이라고 극찬했다.
트레킹 초기 에너데일 워터에서 시작해 해발 500m에 있는 산정호수인 앵글탄 등 5일 동안 매일 한두 개의 산을 넘고 호수를 지나는 여정이다.
특히 레이크 디스트릭트의 20개 호수 중 여섯 번째 넓이인 하웨스 워터(Hawes Water)를 산 정상에서 내려다볼 때는 옥황상제가 백두산 천지를 내려다볼 때의 느낌이 그와 같지 않을까 상상하기도 한다. 런던과 글래스고까지 이어지는 고속도로와 종단 철길이 지나는 샤프 마을을 가로질러 벗어나면서 호수 지역은 끝나고 잉글랜드 내륙으로 깊숙이 들어가게 된다.
요크셔 데일스(Yorkshire Dales) - 거리 112km 소요 기간 5일
두 번째 국립공원인 요크셔 데일스에 들어서면 호수가 산재한 산악 지역이었던 레이크 디스트릭트와는 지세가 완전히 달라진다. 사방은 거침없이 펼쳐진 황야와 그 너머 지평선뿐이다. 영국의 고산지대 황무지인‘무어랜드(moorland)’가 시작되는 것이다.
본디 바람이 거센 날이 아니더라도 제멋대로 설쳐대는 바람 물결에 눈을 제대로 못 뜨기는 하지만 트레커들에게 청량제나 다름없다. 초원을 뒤덮고 있는 잡초와 야생화들은 바람 따위는 면역이 되었다는 듯 대지에 바싹 붙어 저들끼리 똘똘 뭉쳐 있거나, 나무들은 한 그루 두 그루씩 서로서로 거리를 유지하며 외롭게 서 있는 풍경이 잉글랜드 무어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광활한 황야와 함께 수많은 계곡과 높고 낮은 구릉으로 천혜의 자연경관을 갖춘 요크셔 데일스는‘신이 내린 땅’이라 불리면서 매년 800만 명 이상의 관광객을 끌어모으고 있다. 소박한 아름다움을 풍기는 켈드와 리스 같은 작은 시골 마을은 물론 커비스티븐과 리치몬드 같은 중세 이래의 대도시들도 이 구간을 지나며 만날 수 있다.
영국 내륙의 자연과 역사, 문화를 가장 다양하게 품고 있는 구간이기도 하다. 잉글랜드의 등뼈인 페나인산맥의 중심부에서 만나는 나인 스탠더드스는 해발 700m의 산 정상에 쌓인 아홉 개의 돌무덤이다. 웅장하기 이를 데 없는 이 지점을 넘으면 CTC의 절반을 지난 셈.
노스요크 무어스(North York Moors) - 거리 98km 소요 기간 5일
노스요크 무어스는 아름다운 야생화인 헤더가 자생하는 가장 넓은 지역이기도 하다. 멀리서 보면 보라색 꽃밭이지만 가까이 다가서 보면 형형색색의 들꽃들로 이뤄진 덤불숲으로, 보라색 헤더의 물결이 걷는 이들의 오감을 압도한다.
서른 살의 짧은 생을 살다간 작가 에밀리 브론테와 그녀 자매들의 삶의 터전도 이 지역이었고, 두 자매가 그려 낸 두 편의 슬픈 이야기의 배경도 이곳 요크셔의 무어랜드였다. 명작<폭풍의 언덕>과<제인 에어>가 탄생할 수 있었던 토양이었다.
무어랜드의 거센 바람에 맞서며 보랏빛 헤더 꽃밭을 걷는 동안, 소설<폭풍의 언덕> 속 남녀 주인공이 함께 말 달리던 슬픈 환영과 마주칠 수도 있다.
칼톤 무어 정상에서는 아이리시해를 떠난 지 십여 일 만에 섬의 반대편 바다를 희미하게나마 시야에 넣는다. 자그마한 시골 역인 그로스먼트에서는“칙칙폭폭” 소리와 함께 하얀 수증기를 내뿜는 증기기관차와 조우하기도 한다. 대부분의 트레커들은 마지막 날 로빈후드스 베이에 도착해 북해 바다와 마주하고 주머니에서 조약돌 하나를 꺼내 바다를 향해 힘껏 던진다. 로빈후드스 베이까지 무사히 인도해줄 거라는 믿음으로 첫날 세인트비스 해변에서 하나 주워 고이 간직한 조약돌이다.
travel tip
찾아가는 교통편
런던 도심 북부에 있는 유스턴역에서 스코틀랜드로 올라가는 글래스고행 기차를 타고 잉글랜드 북부까지 올라가다가 칼라일역에서 내린 후, 세인트비스로 가는 시골 열차에 환승한다.
여행하기 좋은 시기
무어 들판에 헤더꽃이 만발하는 8월과 9월이 적기다. 비가 많은 영국에서는 우리처럼 우기철이 따로 없다. 대체로 사나흘에 한번은 가랑비를 만날 준비를 하고 가는 게 좋다.
소요 예산
CTC 횡단 동안 하루 평균 숙박비는 5만5000원, 식비는 4만5000원 수준이다. 먹고 자는 데에만 하루 10만원을 쓰는 셈이다. 교통비도 비싼 편이다. 런던에서 트레킹 출발지인 세인트비스까지 한 번 갈아타는 기차로 이동하는 데에 약 22만원이 들었다. 트레킹이 끝나고 로빈후드스 베이에서 스코틀랜드까지 올라갔다가 글래스고와 맨체스터를 거쳐 런던까지 돌아오는 데에도 25만원 정도 들었다.
기타 여행 팁
이정표가 그다지 많지 않다. 상세 지도는 물론, GPS와 나침반은 필수품이다.
도보 여행가 이영철
퇴직 후 5년 동안 자신이 선정한‘세계 10대 트레일’을 모두 종주했다.<안나푸르나에서 산티아고까지><동해안 해파랑길><영국을 걷다><투르 드 몽블랑> 4권의 행서를 출간했다. 그의 여행 기록은 블로그 누들스 라이브러리(blog.naver.com/noodles819)에서 만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