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의 얼굴 안성기 편

기사 요약글

많은 상상을 통해서 생각의 깊이를 만들어놔야 연기할 때 저 깊은 곳에서 꺼내놓을 게 생겨요.

기사 내용

 

배우 안성기를 도형으로 표현한다면 정육각면체라고 할까? 변의 길이와 내각의 크기가 모두 같은 정육각면체처럼 안성기는 어느 하나 흠잡을 데 없는 반듯한 인간의 전형이다. 모든 후배들이 본받고 싶어 하는 배우들의 멘토이자 한 시대를 모범적으로 살아가는 초로의 사내로서도 흠결이 없다. 배우로서도 삼각형이나 사각형보다 더 다채로운 이미지를 품고 있어서 보는 이들을 지루하지 않게 하는 마력도 있다. 마치 정육각면체를 이루고 있는 벌집처럼 늘 달콤한 꿀을 품고 있어서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배우로서의 시간 59년째. 1957년 영화 <황혼열차>에서 아역으로 데뷔한 이후 130여 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바람 불어 좋은 날> <고래사냥>의 젊은 안성기부터 <칠수와 만수> <만다라>에서는 개성 넘치는 안성기로, <하얀전쟁> <남부군>에서의 중후한 안성기에 이르기까지. 영화배우로서 그의 필모그래피는 정육각면체로도 표현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르렀다.

아직도 청년 같은 몸매를 유지하고 있네요?
매일 헬스클럽에 가서 꾸준히 운동합니다. 러닝머신에서 한 시간 정도 땀을 흘린 뒤 웨이트트레이닝을 병행하죠. 또 ‘싱글벙글’이라고 배우들을 중심으로 한 골프 모임이 있어요. 박중훈, 장동건, 차태현, 황정민, 김민종, 김수로, 현빈 등 한창 활동하는 후배 배우들이 회원이죠. 제가 맏형입니다. 촬영 스케줄이 없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일주일에 한 번씩 필드에 나갑니다.

영화 <사냥>(5월 개봉) 촬영을 끝내셨지요? 촬영하면서 상당히 고생이 많으셨다는 소문이 있던데요. 어떤 역할인가요?
허허, 많이 뛰어다녔죠. 이우철이라는 신인 감독 작품인데 금맥이 발견된 탄광을 배경으로 이를 차지하려고 싸우는 주민과 사냥꾼의 이야기입니다. 영화에서 저는 노인 사냥꾼으로 나오죠. 탄광 사고로 목숨을 잃을 뻔하다가 후배의 희생으로 살아난 뒤 그의 딸(한예리 분)을 키우면서 살아가죠. 그런데 알고 보니 그 딸이 자신의 손녀였던 겁니다. 탄광 장면 등을 찍기 위해 화순 탄광이나 깊은 산속에서 주로 뛰어다니면서 촬영을 많이 했어요. 조진웅, 손현주 등 후배들과 촬영했는데 그 친구들이 많이 힘들어했습니다.

작품을 고를 때 기준이 무엇인가요?
작품의 완성도를 많이 생각합니다. 저예산 영화라도 좋은 영화는 출연한다는 생각입니다. 다음 작품이 <매미소리>라고 다큐멘터리 인디 영화로 큰 화제를 모았던 <워낭소리>의 이충렬 감독이 만드는 영화예요.

지난해에는 할리우드 영화 <제7기사단>에도 출연했는데요?
허허. 그 영화가 개봉은 했는데 큰 반향 없이 묻혀버린 것 같아서 안타까워요. 모건 프리먼, 클라이브 오언 같은 유명 배우들도 많이 나오는데…. 사실 제가 합류가 워낙 늦어져서 의상이나 헤어 콘셉트가 미진해서 좀 아쉬웠어요. 그리고 영어도 잘 못하는데 잘하려고 하다 보니 힘들었죠. 앞으로 그런 기회가 또 온다면 좋은 작품과 역할로 좀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배우로서도 좋은 경험이었죠.

<화장>의 임권택 감독이나 <부러진 화살>의 정지영 감독을 빼면 이제 대부분 후배 감독과 연기하는 일이 많죠?
현장에 가면 늘 제 나이가 가장 많아요. 우리나라에만 있는 현상이 아닐까 해요. 영화예술이라는 게 나이 든 사람들의 지혜로움이나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섞여야만 하는데 요즘엔 그런 부분이 없어서 아쉽죠. 제가 아는 촬영감독이나 스태프 모두 은퇴 아닌 은퇴를 했어요. 젊은 사람들이 찍으니까 장면들이 힘도 있고 스피드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여백이 없어 보여서 아쉬워요. 영화의 깊은 감동은 같이 일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합쳐져야 나오거든요. 그런데 요즘 그 쪽이 약하다 보니 예전에 비해 작품성 있고, 세계성 있는 작품이 드물어졌죠. 천만 영화는 많아졌지만 우리들만의 잔치를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있어요.

아날로그와 디지털 시대를 관통하는 연기 인생을 보내고 있는데 어려운 점은 없나요?
영화가 디지털화되면서 우리 영화가 국제적인 경쟁력을 갖게 됐죠. 이제는 할리우드 영화와 뒤질 것이 없잖아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정확한 콘티를 가지고 필름을 아껴가면서 찍지 않고 마구잡이로 찍다 보니까 시간도 오래 걸리고 집중력도 떨어지는 단점이 있어요. 특히 배우들이 쉴 틈이 없어서 힘들죠. 필름에서 디지털로 바뀌어도 영화의 정서 자체는 아날로그적인 게 묻어 있어야 하는데 그런 부분이 사라지는 것 같아 상당히 아쉬워요.

많은 후배들이 인터뷰에서 자신의 멘토를 안성기라고 얘기하곤 합니다. 그런 말을 들으면 부담감은 없나요?
왜 부담이 없겠어요. 더욱 잘해야겠다는 생각을 늘 하죠. 또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배우의 정년을 연장해놔야겠다는 사명감도 있어요. 우리는 배우가 너무 단명하는 것 같아요.

뭐든지 한 번 시작하면 줄기차게 하는 거 같아요. 유니세프 홍보대사도 그렇고, 동서식품 광고 모델도 그렇고요.
재능 기부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거라고 봐요. 유니세프는 저와 같은 전쟁 세대들이 어린 시절에 많은 도움을 받았던 국제 구호 단체입니다. 우리가 굉장히 힘들었을 때 손길을 준 세상에 대한 보답으로 서로의 아픔을 나누었으면 하는 생각에서 1992년부터 홍보대사로 활동했어요. 실제로는 1980년대 후반부터 꾸준히 기부하고 활동했습니다. 동서식품 광고도 1983년에 시작했으니 꽤 오래한 셈이죠.

두 아드님이 모두 예술 계통에서 공부하고 있는데 한 명 정도는 다른 일을 했으면 하는 바람이 없었나요?
두 아들이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밥을 먹고 살 수 있으면 좋겠다는 게 저와 아내의 생각입니다. 잘 먹고 잘 사는 건 바라지도 않아요. 큰아들은 그림을 전공하고, 둘째는 사진을 전공한 뒤 지금은 영화 쪽 공부를 하고 있어요. 큰아들 녀석은 제가 객관적으로 봐도 그림을 꽤 잘 그리는 것 같아요. 잘하면 그림으로 먹고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둘째는 아직 모르겠어요. 잘하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영화 일을 할 것 같아요.

 

예술적 재능은 누구를 닮았나요?
글쎄요. 골고루 닮은 거겠죠. 제 처도 조소를 전공했으니까요.

자녀들에게 어떤 어버지인가요?
조금은 엄한 아버지가 아닐까 생각해요. 친구처럼 지내면서 자식들과 거리감이 없는 부모들이 많은데 저는 나이가 들어서 얻은 자식들이어서 그런지 그렇게 못해요. 엄하지만 마음은 따뜻한 아버지라고나 할까요.

드라마나 뮤지컬 등 제의가 많았을 텐데 영화만 고집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요즘은 드라마나 뮤지컬에 출연하자는 제안 자체가 없어요. 1980년대에 주로 드라마 출연 제의가 많았는데 왠지 너무 쉽게 볼 수 있고, 화면도 너무 작고, 집중력이 떨어진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에 비해 영화는 관객의 선택으로 돈을 내고 들어와서 집중해서 보잖아요. 관객의 수고와 선택을 위해 제가 각오를 새롭게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영화만 고집했죠. 또 얘기를 들어보면 쪽대본으로 시간에 쫓겨 밤샘 촬영을 한다는데 저는 절대로 못할 거 같아요.

지난해 임권택 감독의 영화 <화장>에서 암으로 죽어가는 아내를 둔 중년의 남자를 연기하셨죠. 늙어간다는 것과 죽음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을 텐데요.
꼭 영화가 아니라도 50대가 됐을 때 그 전과는 확 달라진 삶이 보이더군요. ‘이제 오르막은 다 올라왔고 내려가는 길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자꾸만 되돌아보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자는 다짐을 했죠. 그래도 모든 일에 대해 신중할 수밖에 없어요. 인터뷰나 영화를 고르는 일에 이르기까지 실수나 실패를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젊은 시절에는 실패해도 다시 복구할 수 있지만 나이가 들면 그게 쉽지 않거든요. 그러다 보니 사람이 굼떠져요. 그래도 하나 변치 않는 건 내일 세상이 끝난다 해도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사는 거겠죠.

너무 바빠서 개인적인 시간을 갖기가 쉽지 않을 텐데요.
제 시간을 많이 가지려고 늘 노력하죠. 배우에게 바쁜 건 독약입니다. 창작을 하는 사람에게는 빈둥대는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죠. 저는 항상 기지개를 켜기 직전 같은 상태로 몸을 만들어놔요. 많은 상상을 통해서 생각의 깊이를 만들어놔야 연기할 때 저 깊은 곳에서 꺼내놓을 게 생기거든요.

나이 들면 친구밖에 없다는데 친구들과는 자주 만나는지요?
그럼요. 주변에 친구들이 많아요. 정년퇴직한 친구도 있고, 사업하는 친구도 있고요. 소주도 마셔가면서 옛날 얘기도 하고, 요즘 사는 얘기도 하죠. 제가 초등학교 동창은 별로 없고, 중학교 동창들이 많아요. 초등학교 때는 영화 촬영 다니느라 친구를 사귈 시간이 없었거든요.

아, 가수 조용필 씨가 중학교 같은 반 친구였다면서요?
네. 경동중학교 2학년 때 같은 반 친구였어요. 용필이는 그때 키가 지금 키랑 똑같아요. 강화도에 소풍 가서 기타 치고 놀면서 찍은 사진이 지금도 인터넷에 떠돌아다니고 있더라고요.

신혼 시절의 아내와 지금의 아내는 많이 다를 것 같아요. 60대가 넘으면 ‘마누라’한테 쥐어 사는 게 편하다는 얘기도 있는데요?
살아가다 보니 각자에게 남성호르몬과 여성호르몬이 서로 많아지면서 묘하게 만나는 지점이 생깁니다. 굳이 얘기하자면 저는 좀 더 소심한 남편이 됐고, 제 아내는 좀 더 씩씩한 아내가 된 거죠. 되도록 서로 충돌하지 않고 조화롭게 살려고 노력합니다.

자신의 전성기는 언제였다고 생각하나요?
가장 활발하게 활동했던 1980년대를 시작으로 1990년대까지를 전성기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최근에도 기사를 보면 ‘안성기가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는 표현이 자주 등장하더군요. 그 말을 빌려서 안성기의 전성기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고 말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독자들께 힘이 되는 한마디 부탁하겠습니다.
<헤이데이> 독자 여러분, 우리 사회가 경제적으로 침체되어 있는데 이럴 때일수록 체력이 좋아야 힘든 세상과 싸울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는 나부터 건강해야 합니다.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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