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추문

기사 요약글

성희롱 공화국, 대한민국.

기사 내용

손녀딸 같아서 가슴을 만졌습니다.

세계 곳곳에서 유명한, 나이 든, 명예를 가졌던 이들의 성희롱, 성폭력 사고 소식을 종종 접할 수 있다. 최근 우리에게 따뜻한 아빠의 이미지로 웃음을 줬던 빌 코스비의 성폭행 사건이나 유력한 노벨상 수상자 후보이며 천문학자인 제프리 마시 교수의 성희롱 소식을 접하니 더욱 답답하다. 마시 교수가 제자들에게 분별 없는 성적 접촉을 해온 것은 10여 년 전부터라고 하는데, 그동안 대학 당국은 그의 명성 때문에 '태도 경고' 정도의 주의를 줬는데 이번에 여성단체와 여제자들의 거센 항의에 밀려 결국 그는 사직하고 말았다.

그럼, 우리나라는 어떤가? 가히 '성희롱 공화국'이라 할 정도로 성희롱 뉴스가 많은데 늘 그때뿐이다. 특히 명예를 많이 가진 유력한 인물일수록 그가 저지른 성희롱의 책임을 엄정하게 묻고 처벌하는 경우를 거의 보지 못했다. '성폭력, 가정폭력, 학교폭력, 불량식품 근절'을 기치로 삼아 출발했던 이 정부를 비틀거리게 했던 '윤창중 대변인의 인턴 직원에 대한 성희롱 사건'뿐 아니라 쉴 새 없이 터지는 교수들, 정치가들의 성희롱 사건 등이 사회를 떠들썩하게 하다가 금세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잦아들었다.
 

만약 처음 윤창중 씨의 성희롱 사건이 일어났을 때 정부의 강력한 대처와 엄벌이 있었다면 오늘날 성희롱 사건은 확연히 줄었을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때 정부는 그 사건을 윤창중이라는 개인의 문제로 넘기지 말고, 그의 해고와 공개 사과, 피해를 당한 인턴에 대한 진정성 있는 사과와 보상으로 성희롱의 대가가 어떠한지 보여주었다면 첫 단추를 잘 꿸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부는 윤창중이라는 개인이 귀국 후 가진 기자회견을 용인함으로써 그의 성희롱 사건이 개인적인 '실수'였음을 인정한 꼴이 되어버렸고, 그의 사직을 조용히 받아들임으로써 성희롱에 대한 정부의 태도를 확실히 보여줄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쳤다. 게다가 윤창중 씨는 기자회견에서 "저는 그럴 의도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했지만, 성희롱을 판단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가해자의 의도가 아니라 피해자의 느낌이다. 가해자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피해자가 성적 수치심을 느껴 불편했다면 그것은 성희롱이다. 다시 말하면 윤창중 씨가 의도가 있었든 없었든 인턴 직원이 성적으로 수치심을 느꼈고 그로 인해 업무를 진행하는 데 어려움을 느꼈다니 그의 행위는 명확히 성희롱의 요건을 갖추었다.
 

그가 기자회견에서 인턴 직원을 '가이드'라 불렀던 이유도 실수라기보다는 치밀한 계산이 있었던 듯하다. '가이드'라고 하면 왠지 공적인 관계처럼 보이지 않기 때문인데, 가이드와 안내받는 사람 입장이라 해도 그런 일이 있었다면 '업무상 위계에 의한' 명백한 성희롱이다. 대한민국 이름에 먹칠했던 윤창중 씨의 성희롱 사건은 그의 칩거로 조용히 묻혀버렸고, 아마도 '손녀딸 같아서 가슴을 만졌다'던 박희태 씨의 어처구니없는 성희롱도 지금까지 조용한 것을 보니, 그것도 그냥 묻히는 모양이다. 이렇게 유력한 인사들의 성희롱 사건이 일어나면 잠시 끓는 냄비처럼 부글부글 들끓었다가 금세 조용해지는 것이 우리나라에서 성희롱에 대한 의식의 본질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저는 그럴 의도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왜 그러는 걸까요?
실상 성희롱은 누가 힘을 가지고 있는가의 문제이지, 남녀 사이의 문제가 아닌데, 여전히 남녀의 일처럼 다뤄지는 것을 보면, 권력과 명예를 가진 남성들이 자신보다 약한 위치에 있는 여성들을 대하는 태도는 여전히 '공적'이라기보다 '사적'이며 '폭력적'이라는 걸 알 수 있다.
 

공적으로 만나 일하는 사이에서 사적인 언사나 무례한 태도와 행동이 묵인되기 시작하면, 일의 효율은커녕 같은 공간에 함께 있는 것조차 불편하고 두려운 마음이 들 것이다. 성희롱에 휘말릴까 봐 이성 동료와 접촉을 억제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 동료와의 접촉을 동료가 아닌 이성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성희롱에 휘말리는 것이다. 정작 가해자들을 만나서 성희롱의 동기를 들어보면, 여성과 남성의 생각 차이를 잘 몰라서 오해로 인한 성희롱이었을 수도 있고, 상대에 대한 감사나 호감의 감정을 어떻게 나타내야 하는지를 잘 몰라서였던 이들도 있다. 상대 여성의 친절을 자신에 대한 이성적 호감이라 착각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또 그렇게 많은 공직을 역임하고도 공과 사를 구별하지 못하는 무분별함 때문일 때도 많다.
 

물론 악의적인 가해자도 있고, 드물게 상대 여성이 악의적일 때도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스스로에게 분명히 해야 할 것은 밖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다 공적 대상이라는 것이다. 인색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일 때문에 당신을 만나고, 당신의 지시를 따르기 때문에 당신에게 친절한 것이지, 당신에 대한 호감이나 이성적인 매력 때문이 아니다. 그리고 공적으로 사람을 만났을 때는 그 사람의 지위와 상관없이 존칭을 써야 하고, 함부로 그의 몸을 만지지 않는 것이 예의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무엇보다 성희롱으로 고소를 당하면 가해자는 피해자에게 금전적 보상을 해야 할 뿐 아니라, 벌금도 내야 하며, 성희롱에 관련된 교육을 받아야 하고, 다니던 직장에서 파면당하기 일쑤이며, 심지어 몇 십 년을 같이 산 아내에게 이혼당하기도 한다. 그야말로 그간 열심히 살아왔던 자신의 인생이 한 번에 좌초되는 것이다.
 

성희롱을 하게 되면 그 사람이 이제까지 쌓아온 신뢰와 공적이 다 물거품이 되어버린다. 가장 가슴 아픈 것은 성희롱 가해자가 된 그들이 나이 들어 스스로에게 느끼는 부끄러움과 자괴감이다. 열심히 일해 높은 자리에 올랐고, 자신의 성취에 자랑스러워했을 그들이 자신의 천박한 성적 태도 때문에 가장 상처받는다. 그리고 그런 자신을 용서하지 못해 괴로워하며 앞으로 어떻게 얼굴을 들고 살아갈지에 대한 두려움으로 힘들어한다.
 

이제까지 성실함과 진정성으로 당신의 삶을 잘 살아온, 사회에 기여해온 당신 인생의 후반전을 멋지게 마무리하려면 자신의 행동과 태도가 다른 사람에게 오해받지 않도록 스스로에게 좀 더, 아니 더욱 엄정할 필요가 있다. '공적으론 엄격하게, 사적으론 다정하게!' 이런 캐치프레이즈라도 걸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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