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조언 - 그대에겐 향기가 나는가?

기사 요약글

나잇값을 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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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에겐 향기가 나는가?

이제 50대가 꽉 차는 쉰아홉이다. 가끔 청년 시절의 사진이 책갈피 같은 곳에서 툭 튀어나와 나를 놀라게도 하지만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안 든다. 오히려 ‘잘 지냈구나’ 하는 안도의 마음과 함께 과연 나잇값을 하고 있는지 의구심이 앞선다.
‘사회적 역할’보다는 나이에 걸맞은 내공을 길렀는지, 그 내공으로 노후를 잘 통과할 수 있는지가 더 궁금해진 것이다. 친구들 스마트폰에 어쩌다 찍힌 최근 내 사진이 전송될 때가 있다. 그 친구들은 나를 어떻게 바라볼까? 나에게서 육십 년 인생을 버텨온 어떤 철학 같은 것을 감지할까? 과연 나에게 그런 것이 있기는 한가?

나이가 들면서 터득하는 게 여럿 있다.
사람 몸에서 냄새가 난다는 사실이다. 젊었을 때는 몰랐다. 뻘 밭에 나뒹굴어도 향긋한 냄새가 나는 시절이었으니까. 지금은 아니다. 퀴퀴한 냄새… 친한 친구에게서도 그런 냄새를 맡을 때면 서글퍼진다. 나는 여인들이 향수를 그토록 즐겨 쓰는 이유를 잘 몰랐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나도 향수를 필수품으로 갖고 다니기 시작했다. 물론 차 안에 넣어두기는 하지만, 그 요사스런 물건이 그렇게 요긴하다는 사실을 드디어 터득했다. 늙고 있음을 만방에 알리는 그 냄새를 차단하는 데에는 향수가 최고다. 그러나 그것도 한계가 있을 터, 정신의 냄새는 어떤가? 혹시 정신에서 썩은 악취가 풍기지는 않는가? 나는 그런 사람을 여럿 목격했다. 나잇값 못하는 사람들 말이다. 행동이 조악하거나, 사욕이 넘치거나, 아니면 세속적 욕망에 쉽게 유혹당하는 사람들. 직장에서 물러난 50대 후반 연령대에 그런 사람들이 몰려 있을 가능성이 크다. 특히 명함이 모든 것인 남자들은 명함 없이 사는 삶을 견뎌내기 어렵다. 명함을 둘러싸고 시간과 일상, 생각과 정서, 친교와 관계가 이뤄져 왔을 터인데, 그 핵이 소멸되면 모든 것이 흩어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그는 아마 ‘홀로 지내는 법’을 터득하지 못했을 것이고, ‘직무가 없는 시간’을 상상하지 못할 것이고, 무엇으로 낯선 시간을 보내야 하는지 마음의 지도를 그릴 수 없다. 육신에서 냄새가 나기 시작하는 그 연령대에 정신의 악취는 그 이전부터 진동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다만 자신만 모르고 있었을 뿐. 육신의 냄새는 향수로 다스린다고 하면 정신의 냄새는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가? 이게 바로 香氣, 마음의 香氣다. 그대는 마음의 향기가 있는가?

 

최근 내 사진을 보면서 자문하는 게 이거다. 있는 듯 없는 듯, 알쏭달쏭하다. 확신이 없다. 서울대 교수이고 칼럼니스트인 사람이 내숭 떤다고 할지 모르나 사실이다. 유명한 사람일수록, 성공한 사람일수록 마음의 향기가 없을 개연성이 크다고 하면 과장일까. 조금 좁혀서 士, 師, 授 자를 단 전문 직업군에서 그런 사람이 많이 나타난다. 평생 한 가지 지식 영역에만 종사해왔기 때문이고, 그 영역을 넘어 다른 사람들의 삶이 어떤지 관조할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 우물을 파라’는 옛말은 세속적 출세에는 맞는 말이지만 ‘내공 기르기’에는 아주 좋지 않은 방법이다. 여러 우물을 두루 살펴봐야 내공이 생긴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감이 와야 자신의 마음에 여유가 생기고 ‘이해와 관용’의 여지가 생성된다.

 

이성과 감성이 삶을 운영하는 두 축이라면, 이성은 현실 생활(혹은 경제력)과 직결되고 감성은 마음의 역량과 격조(혹은 예술성)를 관할한다. 50대까지의 인생 궤적이 주로 이성 능력과 결부되는데 현대사회는 ‘이성 과잉’을 요구하고 또 그것에 잘 적응하는 사람이 출세 가능성이 높다는 것은 잘 알려진 바다. 한 우물을 팔수록 , 그래서 세속적 성공을 구가할수록 이성이 승하고 감성이 위축된다는 뜻이다. 물론 예술 분야는 그 역이지만, 이성과 감성의 불균형 상태는 마찬가지다. 이게 바로 내공이 취약해지고 마음의 향기가 나지 않는 근본 이유다. 특히 감성을 극도로 자제해야 하는 직업집단에서 ‘마음의 향기’를 잃어버리는 사태, 또는 향기를 생성하는 샘물이 망가지는 사태가 빈발하는 것은 자신도 모르게 빠져든 불균형 상태 때문이다.

 

십여 년 전, 미국 서부에서 안식년을 보냈던 어느 날 밤에 아내와 영화를 보러 갔다. 메릴 스트립 주연의. ‘하나의 진실’이 아니라 ‘하나 분명한 것’으로 번역하면 딱 맞다. 남편은 하버드대학 영문과 교수이자 작가로서 이름이 알려진 명사다. 행복하게 지내던 부부 생활에 비상이 걸렸다. 메릴 스트립이 암 투병을 시작한 것이다. 멋지게 보였던 유명 작가, 내공이 단단했고 마음의 향기가 가득했던 그 남편이 시름없이 방황하기 시작했다. 어찌할 바를 몰랐던 것이다. 병구완의 난감함, 아픈 아내에 대한 죄스런 마음, 홀로 남는 것에 대한 두려움, 일그러지는 일상, 그 모든 파열 앞에 유명 작가이자 교수는 스스로 무너졌다. 카메라 포커스는 남편이 어떻게 방황하고 좌절하는지, 그리고 무너지는 남편을 바라보는 부인의 담담한 시선에 맞춰져 있었다. 부인의 내공이 더 컸던 것이다. 돌아오는 길은 침묵이었다. 그 남편을 자신에게 대입하고 있을 나에게 아내는 생각의 여유를 주었다.


마음에서 향기가 나도록 하는 게 그토록 어려울까? 아니다. 남자들은 평생 경제를 떠받치느라 이성의 불을 너무 심하게 켜고 살았고, 감성의 심지를 죽이고 살았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된다. 전업주부로 살아온 여성들은 그 역일지 모른다. 이성보다는 감성적 동감을 갈구하고 살았다는 깨달음 말이다. 이 어긋남이 부부 생활을 위기로 몰고 간다. 이성과 감성의 불균형 상태가 자신들의 마음 밭에서 향기 나는 꽃나무를 메말라 죽게 만들었을지 모른다.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주관적 판단이 몇 겹 낀 안경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연령이 중년이다. 그것은 사실 이성으로 걸러진 객관적 가치관은 아닌데, 객관적이라 자신 있게 믿는 오류의 바다에 빠졌을 가능성이 높다. 중년은 고집스럽다. 경험 지층이 두텁기 때문이다. 그런 마음의 토양에서는 향기가 생기지 않는다. 감성의 촛불로 그것을 녹여 내야 한다. 동감 능력이 그것이다. 동감에서 이해와 관용이 생겨난다.

 

동감 능력을 키울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듣고, 소설을 읽고, 다른 사람들의 얘기에서 삶의 드라마를 읽어 내고, 그것을 자신에게 대입하고, 마음의 밭에서 어떤 반향이 울리는지를 감지하는 것. 그리 어렵지 않다. 젊은 시절 세상을 이성의 힘으로 대했다면, 이제는 세상이 전하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 육십은 이순(耳順)이라는 논어의 경구를 나는 그렇게 이해한다. 들어라, 자꾸 들어라, 그래서 동감 능력을 키우고 동감 영역을 넓혀라, 그렇게 말이다. 그러면 삶의 감춰진 모습이 다가서고, 죽음의 소리가 낯설지 않을지 모른다. 향기는 그런 사람에게서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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