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데이 1월호의 인물 <유동근>

기사 요약글

최고가 되기 위해 더 노력할 여지가 남아 있을 때, 그때를 전성기라고 얘기하고 싶네요.

기사 내용

유동근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표지 인물은 유동근. 그의 카리스마에 대해서라면 주워들은 얘기가 많았다. 더군다나 연산군, 수양대군, 태조, 태종, 흥선대원군까지 개성 강한 왕은 죄다 거친 그에게는 어쩔 수 없는 위엄이 연상될 수밖에 없었다. 여하튼 드라마 촬영으로 옴짝달싹할 수 없는 그를 위해 방송국 출연자 대기실에 간이 스튜디오를 차렸고, 그는 예상 시간보다 30분이나 먼저 문을 열고 들어섰다. 유동근은 평균연령 30대 초반의 스태프에게 ‘같이 일하는 사람’으로서 대우를 확실히 하는 사람이었다. 서릿발 같은 눈빛과 공간을 꽉 채우는 밀도 높은 목소리는 ‘밝고 경쾌한 분위기를 내달라’는 주문에 나른하게 풀어졌고, 그의 과장된 몸짓과 표정 덕분에 세 평 남짓한 촬영장은 웃음이 넘쳤다. 도무지 곁을 내줄 것 같지 않던 그는 아무렇지 않게 ‘분칠한 남자의 비애’를 얘기하는 인간적인 사람이었다. 이날의 최대 변수는 사실 이 지점이었다.

 

<가족끼리 왜이래> 시청률이 37%나 나왔어요. 바쁘지만 보람은 있으시죠?
그럼요. 현장 분위기가 좋다 보니 일하는 게 즐겁죠. <정도전>도 그렇고 2014년은 제가 작품 복이 좀 있었네요. 꼭 시청률이 좋아서라기보다는 대본을 읽는 것만으로도 치유받는 기분이 들었거든요.

극 중에서 무심한 자식에게 불효 소송을 거는 아버지로 나오죠. 더군다나 3개월 시한부 선고까지 받았는데 중년의 아버지라는 입장에서 대본에 공감하는 부분이 많았던 것 같아요.
오히려 부모의 입장보다 자식의 입장에서 나를 되돌아보는 계기가 됐어요. ‘나도 강재처럼 젊었을 때 부모한테 못되게 군 적이 많았지, 달봉이처럼 공부 안 해서 속 썩인 적이 있었지’ 하고 까마득하게 잊고 살던기억이 나더라고요. 작년에 어머님이 돌아가셨는데, 병원에 누워 계실 때도 자주 못 가본 게 미안해서 눈도 잘 못 맞추고 손등 한 번 못 쓰다듬고 그냥 그 양반을 보냈어요. 마음은 그게 아니었는데 겸연쩍어서 표현을 잘 못하고 살았던 거죠. 그저 좋은 물건 사드리면서 효도한다고 생각했으니 참…. 저한테도 대학생 아들딸이 하나씩 있는데 옛날 일을 떠올려보니 ‘쟤들도 다 부모에 대한 애틋함은 있지만 예전의 내가 그랬듯 표현을 못하는 거겠지’ 하는 이해가 생기더라고요. 자연히 자식들에게 기대하고 싶은 마음도, 섭섭한 마음도 점점 옅어지는 면이 있죠.

집에서는 어떤 아버지세요?
친구 같은 아버지죠. 아버지로서의 권위나 위엄을 빨리 내려놨어요. 애들한테 “아빠는 완벽한 사람이 아니다. 할 줄 아는 게 없으니 너희가 도와줘야 된다”고 미리 고백을 했죠. 예컨대 딸한테 “아빠 넥타이 좀 골라줘. 난 도저히 못 고르겠다”고 SOS를 친다든가 아들한테 인터넷 좀 가르쳐 달라고 부탁을 해요. 나는 네 나이 때 아무것도 몰랐는데 넌 참 대단하다고 치켜세우기도 잘 하죠. 그러면 애들도 은연중에 ‘저 부족한 남자를 내가 도와줘야지’ 하는 봉사 정신이 생긴다고요. 결과적으로 내가 아주 편해지는 거죠(웃음).

가족이 큰 힘이겠네요?
그럼요. 저는 모든 고민에 대한 해답은 집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좀 언짢거나 신경 쓰이는 일이 생기면 무조건 집으로 가서 가족들이랑 부대껴요. 개인적인 고민과 번뇌 때문에 종교에 의지한다? 저는 그보단 가족에게 먼저 도움을 구했으면 좋겠어요

전인화 씨가 24살에 결혼해 오랫동안 시어머님을 모시고 살았던 얘기는 유명하죠. 남편으로서 고맙고 미안한 마음을 자주 표현하세요?
집사람이 고생 많이 했죠. 어머님 거동이 불편하셔서 외식조차 마음대로 못 하고 살았으니까. (어느 인터뷰에서 전인화는 시어머니를 통해 내면적인 극기 훈련을 거쳤고, 덕분에 나서야 할 때와 물러서야 할 때를 구분해 경솔한 행동을 피할 수 있었다고 고백했다.) 그렇지만 풍선 달고 장미꽃 바치는 이벤트 같은 걸 하자니, 허망하고 대신 매사에 칭찬과 감탄을 잘해주죠. 집사람도 마찬가지지만 우린 서로에게 늘 첫 번째 관객이에요. 그날그날 연기에 대해 평을 하는데 ‘당신 오늘 연기는 이거(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였어’ 라고 칭찬해주면 그 이상 힘이 되는 말이 또 없거든요. 그건 서비스고 노력이에요. 간혹 ‘나는 그런 스타일이 아니야’ 하는데 그건 스타일을 떠나서 서로에 대한 예의의 문제예요. 일적으로 만난 사람한텐 누구라도 호응이나 칭찬 잘하잖아요. 그런 거죠.

노력에 관한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새벽에 혼자 운동장에서 박수와 고함을 치며 연습하더라’ ‘사우나에 갈 때도 대본을 챙겨 간다’는 식의 후배들 목격담이 꽤 있어요. 골프 입문자 시절에는 몇 개월간 하루 한 바구니씩(사과 박스 크기의) 볼을 쳤다고요. 굉장한 노력파인 것 같아요?
평소 8 정도로 연습하면 실전에서 4~5를 보여주긴 쉽거든요. 연습이 충분할수록 현장에서 상대에게 흔들리지 않고 내 연기를 할 수 있어요. 모든 일이 그렇지만 배우라는 직업도 참 쉽지 않아요. 탤런트에 뽑히면 끝난 줄 알았는데 매 작품마다 선택을 받아야 돼죠. 현대극을 잘 끝내고 보니 이젠 사극을 잘해야 되는 거예요. ‘연기’로 통칭하지만, 사실 배역마다 강조하는 것도, 표현해야 하는 것도 다 다르고요. 나이를 먹고 피부가 처지는 걸 보면서 ‘아 젠장 내가 이렇게 무너지는구나’ 싶은데 전에 없이 나이 지긋한 아버지 역을 해보래요. 그럼 또 이걸 어떻게 하나 싶은 거예요. 그런데 처음부터 잘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나요? 그 과정에서 욕도 먹겠지만 다른 사람 손가락질을 두려워하다 보면 아무것도 못하거든요. 그때마다 ‘두고 봐라 내가 해낸다’는 오기로 치열하게 자기랑 싸우다 보면 차차 또 영글어가요. 그런 데서 세월의 묘미가 있는 것 같아요.

원래 낯가림이 있다고 하던데 극 중에서 ‘아빠의 청춘’에 맞춰 혼자 찌르기 댄스를 추는 장면이나 촬영 때 우스꽝스러운 포즈를 생각하면 전혀 상상이 안 돼요.
남자 얼굴에 분을 바른다는 게 어디 쉽겠어요. 배우 수업의 첫걸음은 모멸감이에요. 거절도 많이 당해보고 원래의 나라면 도저히 못할 것 같은 장면도 소화하면서 차차 크는 거죠. 평생 배우는 감독의 선택을 기다려야 하는 을의 입장이기 때문에 ‘내가 어떻게 저런 걸’ 하는 자존심으로는 버티기가 힘들어요. 그러면 스스로 너무 비참해지니까.

사실‘분칠한다’는 표현이 배우 입장에서는 썩 듣기 좋은 표현은 아니잖아요? 그런데도 거리낌이 없네요.
세월이 좋아 배우지, 사실 우리 조상을 따지고 들어가면 결국 분칠하고 이 동네 저 동네 다니면서 춤추고 노래하는 사당패예요. 그런데 사당패는 나라가 평온하면 평온한 대로 어려우면 또 해학과 풍자를 빗대 민심 을 달래줬어요. 배우란 일에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것도 우리의 눈물과 웃음으로 시청자를 위로한다는데 있겠죠. 그걸 좀 더 잘하려고 분가루 지운 인간 유동근일 때도 여러 방면으로 경험을 쌓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매번 선택받는 입장이라고 하지만 들어온 작품을 다 하진 않잖아요. 주로 어떤 기준으로 출연작을 고르세요?
작품 그 자체보단 연출자로서, 작가로서 자질이 보이는 사람들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편이에요. <가족끼리 왜이래>의 전창근 감독이 주말극은 처음이지만 온유하게 사람을 감싸는 리더십이 있어요. 그런 감독이 잘돼야 더 많은 연기자들에게 좋은 기회가 돌아갈 수 있지 않겠어요?

유동근

 

어떤 기사를 보니 역술인이 꼽은 ‘왕의 관상’ 1위가 유동근 씨더라고요.
그랬나요?(웃음) 재미로 이해할 부분이지만 내가 봐도 곤룡포를 입었을 때 썩 어울리는 느낌이 있어요. 예전에 김재형 감독이 촬영장에서도 꼭 한복을 입고 다니게 했는데 별거 아닌 것 같으면서도 조금씩 도시적 체취가 빠져나가니 신기하더라고요. 확실히 사극에 들어가면 몸의 선, 손짓이 예민하게 달라지긴 해요.

대하드라마 같은 경우 수개월에서 1년씩 촬영을 하잖아요. 야외에서 말 타고 검을 휘두르다가 부상을 당하기도 하고 대사에 대한 부담감도 만만치 않은데 그래도 매번 뛰어드는 이유는 뭐예요?
약간 거창하게 표현하자면 사명감 때문이죠. KBS 대하드라마는 시청자의 수신료로 제작하는 프로그램인데 잘못하다간 없어질 위기에 처할 수도 있어요. 더군다나 대하드라마만큼 여러 배우들이 참여할 수 있는 공간도 없죠. 인기와 상관없이 연기력으로 승부를 보는 싸움판이다 보니 배우 입장에서는 덤벼볼 만해요. 어떤 작품에서 그렇게 롱 테이크의 연기를 할 수 있겠어요.<정도전> 같은 경우는 남자들끼리의 진한 대결, 연합을 그리며 통속적이지 않은 멜로 라인을 개척하기도 했죠.

유동근이 내리는 전성기의 정의는 무엇인가요?
아, 이거 어려운데요?(웃음) 일단 배우 입장에서는 굉장히 두려운 단어죠. 왜냐, 전성기를 맞았다면 다음은 내려갈 일밖에 없거든요. 저는 요즘 자꾸 대본이 사랑스럽고 손에서 놓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드는데, 어쩌면 전성기란 이 정도면 됐다고 안주하지 않고 신인처럼 ‘방금 내가 연기를 잘했나? 더 잘할 수는 없었을까?’ 하는 욕심을 가질 때가 아닐까요? 최고가 아니라 최고가 되기 위해 더 노력할 여지가 남아 있을 때, 그때를 전성기라고 얘기하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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