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투어 3탄 중국 서안 역사 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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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서안은 베이징이나 상해에 비해서는 덜 친숙하다. 하지만 양귀비와 당 현종의 러브스토리나 삼장법사와 손오공의 여정을 그린 <서유기>의 배경이라는 걸 알게 된다면 서안이 마냥 낯선 도시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여행가들 사이에서는 중국 500년 역사를 보려면 상해로 가고, 1000년 역사를 보려면 북경으로 가고, 5000년 역사를 다 보려면 서안으로 가라는 말이 전해진다. 서안은 중국의 장대한 역사가 살아 숨 쉬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까지도 고대 문물이 발견되는 까닭에 현지인들은 서안에서 성공하려면 삽 하나만 있어도 된다는 우스갯소리도 한다. 중국 역사를 장식한 굵직굵직한 사건을 두 눈으로 생생하게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서안은 여행지로서 충분히 매력적인 곳이다.
 

2200년 동안 잠자고 있던대륙의 군단 병마용갱
 

대륙의 군단 병마용


진시황제가 자신이 죽은 뒤 70만 명의 노동자들을 불러 모아 지하에 만든 거대 군단. 1974년 농부가 우물을 파다가 우연히 발견했는데 지금까지 4개의 갱도가 발견되었다. 첫 번째로 발견된 1호갱의 면적은 A매치가 열리는 축구 경기장의 2배에 달하고 여기에만 6000점의 주력 부대가 매장돼 있다. 입구에 들어서면 말로만 듣던 대륙의 스케일에 압도되는 규모다. 특수부대가 배치된 2호갱 에는 무릎 꿇은 궁술 무사, 196cm 장신 병사 등이 전시되어 있다. 3호 갱에는 지휘 부대를 배치했으며 이곳에서 사슴뿔로 전쟁의 승부를 점쳤다.

1.병마용의 키는 175~196cm로 당시 중국인의 신장을 반영해 만들어졌다. 하나의 병마용을 완벽히 복원하는 데 최소 4개월에서 길게는 6개월 이상 걸린다.

2.2200여 년 전에 채색한 안료와 섬세한 무늬가 새겨진 신발 바닥은 2호갱의 관람 포인트.

 

가장 큰 규모의 황제릉 무릉과 곽거병의 묘무릉과 곽거병의 묘


병마용갱에서 차로 40분을 달리면 무릉이 나온다. 한 무제가 잠든 무릉은 황제릉 중에서도 가장 큰 규모로 장장 53년에 걸쳐 완성됐다. 세수입의 1/3을 무덤 축조에 썼다고 하니 그 규모와 부장품이 얼마나 화려했는지 가히 상상이 될 만하다. 중국 후한 시대에 저술된 역사서인 <한서>에도 ‘금은보화, 온갖 짐승, 부리던 가축을 순장하니 모두 190가지 부장품을 무덤 안에 넣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무릉 주변에는 빈과 비, 인척의 묘가 많다. 특히 흉노 토벌에 전념한 곽거병 장군 묘에는 대형 석상을 세워 그 공을 기렸다.

 

명대성벽

 

명대성벽

당나라의 장안성을 토대로 명대 1370년부터 1378년에 만들어진 성벽. 둘레는 11.9km로 자전거를 타고 여유롭게 둘러보기 좋다.

 

당 현종과 양귀비의 스토리가 남아 있는 곳 화청지


당 현종과 양귀비의 스토리가 남아 있는 곳화청지

병마용갱이 엄격한 왕권을 상징한다면, 화청지는 왕의 사치와 향락을 보여준다. 화청지는 이 일대에서는 드물게 43도의 온천수가 나오는 곳으로 역대 황제들의 보양지로 통했다. 당 현종이 양귀비를 위해 증축하면서 화청궁으로 불렸다. 욕실은 전각 형태로 모여 있고 당 현종과 양귀비가 함께 들어갔던 해당탕과 당 현종만 이용했던 연화탕 등이 남아 있다. 화청지를 거닐다 보면 유난히 높은 곳에 자리 잡은 조그마한 전각을 볼 수 있다. 당 현종이 양귀비가 머리를 말릴 수 있도록 만든 양발전으로 양귀비를 향한 당 현종의 사랑이 얼마나 각별했는지 알려준다. 마당에 있는 수도 앞은 손이라도 적셔보려는 사람들로 북적댄다.
밤이 되면 화청지는 거대한 세트장으로 변신한다. 당 현종과 양귀비의 로맨스를 시로 승화시킨 백거이의 <장한가>가 장예모 감독의 연출로 화려한 쇼가 펼쳐진다. 5만원대로 볼 수 있는 가성비 최고의 쇼라 할까? 무대와 전각, 원경의 뒷산이 화려한 조명으로 물들면 양귀비의 영혼이 와이어를 타고 내려와 쇼의 시작을 알린다. 연못 옆의 누각에서 불꽃을 쏟아 내는 전쟁 장면 등 눈앞에서 펼쳐지는 현란한 영상미와 무대가 압권이다.

1. 숨은 양귀비 찾기 그림의 가운데, 당 현종과 눈을 맞추며 술잔을 받는 여인이다. 당 현종이 양귀비에게 첫눈에 반했던 모습인데 당시 당 현종은 57세, 양귀비는 23세였다.

2. 양귀비와 당 현종이 함께 목욕을 즐겼던 해당탕.

3. 무대를 넘어서 밤하늘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장한가>. 몸을 사리지 않는 배우들의 명연기까지 더해져 다채로운 볼거리를 제공한다.

 

 

건릉

 

 

피도 눈물도 없던 무측천의 무자비가 세워진건릉

무자비


그야말로 서안은 황제릉의 결정판이다. 어마어마한 규모의 건릉은 당 고종과 중국 최초의 여황제 무측천의 합장묘로 무덤 앞에는 무자비가 세워졌다. 그런데 건릉을 앞에 두고도 못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다. 이유인즉, 건릉은 원래 있던 산봉우리를 파서 만들어진 데다 해발이 남산의 4배에 달해 건릉을 산으로 착각하기 때문. 신도에는 고종의 장례식에 조문 온 61명의 석인상이 있는데 지금은 모두 머리가 없다. 살아 있는 자신의 석상이 죽은 황제의 능에 세워지는 게 께름칙해서 몰래 머리를 잘랐다, 목이 유독 약해서 전쟁 중에 떨어졌다는 설이 전해진다.

 

 

현장법사의 경서가 보관된 곳대안탑

대안탑


서안에서 만날 수 있는 당의 유적으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대자은사다. 이곳의 대안탑은 현장법사가 인도에서 가져온 산스크리트어 경전을 번역하고 보존하기 위해 세워졌다. ‘대안’이라는 이름은 현장법사가 길을 알려준 기러기에게 고마움을 표하기 위함이라는 등 기러기와 관련된 사연이 대부분이다. 과거 시험에 급제한 거인의 이름을 새긴 안탑제명까지 봤다면 탑 꼭대기로 향하자. 가히 압도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장엄한 고도의 풍모를 마주하게될 것이다.
피사의 대안탑? 대자은사를 등지고 대안탑을 보면 오른쪽으로 살짝 기울어진 걸 볼 수 있다. 사천성 지진의 영향 때문에 기울어지기 시작해 현지인들 말로는 해를 거듭할수록 점점 기울어지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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