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인 수녀와 원택 스님이 전하는 스페셜 인터뷰

기사 요약글

이해인 수녀와 원택 스님을 모두 서울에서 만났다.

기사 내용

두 분 모두 현 거주지는 부산이다. 마침 이해인 수녀는 분당서울대병원에서 암 환우를 위한 강연회 때문에, 원택 스님은 영원한 스승 성철 스님의 생전 법문을 기록한 <백일법문> 출간 때문에 서울에 올라와 계셨다. ‘인연’이라는단어가 저절로 떠오르는 만남이었다.

 

원택 스님

올해는 그 어느 해보다 사건 사고가 많아 모두들 힘들었던 해이다. 지금도 경기가 어려운데 내년엔 더 나빠질 거라고 하니 불안하다. 불안한 마음과 상처 난 마음을 어루만져줄 누군가가 절실한 이때, 인연처럼 두 어른이 서울에 나타나셨다. 두 분의 이야기를 <헤이데이> 독자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이야기를 곱씹을수록 우연처럼 두 분의 이야기는 한곳으로 흘렀다. “당장은 손해 보는 것 같아도 그게 손해가 아니다”라는 말씀. 시니어 세대들이 느끼는 것과 공통분모가 많은 말씀이다.


“남들처럼 새치기도 좀 하고, 꾀도 부리고, 융통성도 발휘했으면 이것보다는 좀 낫게 살 텐데…” 하는 자괴감이 마음속에서 고개를 드는 분들에게 두 어른이 위로의 말을 전한다.

 

칠순, 이제 인생의 오후일 뿐

이해인 수녀

‘어느새 인생의 오후를 살고 있긴 하지만 그래서 더욱 새로 오는 시간들이 고맙고 소중하고 다시 한 번 사랑할 수 있는 기회를 선물 받은 기쁨에 새삼 설렐 적이 많습니다. 일상의 길 위에서 한 번이라도 더 감사하고, 한 번이라도 더 웃고, 한 번이라도 더 용서하는 수련생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내게 오는 시간을 새롭게 사랑합니다.’

지난 11월 9일자 가톨릭 서울주보에 실린 ‘시간을 사랑하는 영성’이란 글의 일부입니다. 올해 칠순의 할머니가 ‘인생의 오후’ ‘수련생’을 자처하니 좀 어리둥절하지요? 그런데 어떤 분이 이 글을 읽고 ‘고맙다’고 했습니다. 그분은 지금까지 자기 인생이 깜깜한 밤인줄 알았는데 제 글을 읽고 ‘아, 오후밖에 안 되는구나!’ 했다고 합니다. 그분이 저하고 동갑이거든요. 물론, 인생에서 제 나이는 노을도 올락 말락 하는 때이지요. 늦은 오후라고 할까요? 그래도 깜깜한 밤은 아닙니다. 그리고 죽음조차도 깜깜한 밤은 아니고요. 우리는 모두가 죽는 순간까지 수련생 아닐까요. 정식 수녀가 되기 전 수련받는 수련생처럼 말이죠. 제가 <논어>에서 가장 좋아하는 구절이 ‘수기안인(修己安人)’입니다. 닦을 수, 몸 기, 편안 안, 사람 인. 즉 자기를 닦아서 남을 편안하게 해준다는 뜻입니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기쁨을 놓치지 마세요
‘빨리 가는 시간에 대한 불평과 탄식을 새로 오는 시간에 대한 감사와 기쁨으로 바꾸는 것이야말로 삶의 지혜입니다. 내게 남아 있는 시간들을 알뜰하게 사용하려고 최선을 다하는 노력이 오늘의 나를 지탱해주는 힘입니다.’


11월은 천주교에서 위령성월로 지냅니다. 세상 떠난 이들을 기리는 달이죠. 저는 올해 부쩍 죽음을 자주 그리고 많이 생각하게 됐습니다. 작년 11월부터 수녀님 여섯 분이 잇달아 선종하신 이유도 있습니다.
저 역시 6년 전 암 진단을 받고 본격적으로 죽음을 묵상하기 시작했죠. 5년간 재발하지 않았으니 보통은 ‘완치(完治)’라고 부르는 시기에 접어들었습니다. 하지만 처음 발견했을 때 워낙 심각했기 때문에 감히 완치라고는 부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병을 계기로 확실히 삶을 더욱 사랑하게 된 것은 맞습니다. 최근에는 분당서울대병원에서 암 환우들을 위한 강연회를 가졌습니다. 그분들에게 제 책을 몇 권 드렸습니다. 저는 누구에게 책을 줄 때 그냥 사인만 해드리지 않습니다. 단풍 무늬, 꽃무늬 스티커를 붙여서 드리죠. 그러면 “왜 다른 사람은 스티커 두 장인데, 저는 한 장이에요? 저도 한 장 더 붙여주세요”라며 조르는 분들이 계세요. 중장년분들이 꼭 어린애들처럼 말이죠. 유치해 보여도 저는 이런 게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흔히 놓치고 사는 기쁨은 어쩌면 유치한 곳에 있는지 모릅니다.

스스로를 사랑하기로 해요
최근 들어 부쩍 저 스스로를 사랑하게 됐습니다. 우리 세대가 고생을 많이 했잖아요. 하지만 요즘 들어 하느님은 고난을 많이 받은 사람을 더 사랑하신다는 말뜻을 알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고생 많이 한 나 자신을 사랑하는 연습을 하고 있어요. 저 스스로를 위로해주고, 용서하는 것도 덕(德)이라고 생각합니다. 돌이켜보면 저 역시 ‘완벽주의 강박’ 속에 살았습니다. 수녀원만 해도 생각이 많고 똑똑한 사람들은 오래 못 살고 나간다는 속설이 있고 실제로 그런 경향이 있습니다. 그분들을 보면서 ‘그럼 여태 남아 있는 나는 바보인가?’ 하는 생각도 많이 했어요. 그런데 요새는 이런 묵상을 합니다. ‘아니다, 바보같이 사는 건 쉬운 일인가? 그리고 나는 어쨌든 50년 수도 생활이라는 열매를 맺지 않았나? 저세상으로 갈 때까지 스스로를 위로하고 사랑하고, 또 남들도 위로하고 사랑해야지’라고 말이죠. 그리고 온갖 제약이 많았고, 사람 사이 부대끼는 일도 많았지만 수녀원이라는 공동체 생활이 자신을 지금의 여기까지 밀고 와줬다고 생각합니다. 공동체 생활은 저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지만 위로와 힘을 북돋워주기도 합니다. 속세(俗世)에서 살아가는 여러분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가족, 직장은 생채기를 주기도 하지만, 대부분 치료약도 함께 주지 않던가요.
요즘은 누가 저에 대해 안 좋은 이야기를 해도 ‘고맙다’는 생각이에요. 그 과정은 이렇죠. 누가 저에 대해 안 좋은 생각을 해요. 머릿속에만 있던 그 생각이 결국 차고 넘쳐서 발설을 하죠. 그렇게 말이 돌다가 결국 제 귀에까지 들어오는 거예요. 물론 제 입장에서는 오해이고, 선입견이고 그렇죠. 하지만 말이 돌고 돌아 제 귀에까지 들어올 정도면 사람들에게 그렇게 보이는 면이 있다는 이야기도 되지요. 그래서 전 이렇게 생각을 바꿨어요. ‘이걸 역이용해서 나를 고치면 되겠구나’고요. 순간 자존심도 상하지만 금방 삭히고 웬만하면 상대에게 그 기분이 드러나지 않도록 표정 관리도 하고요. 항상 웃으며 지내려 하죠. 여러분도 해보세요.

자신에게 위로를 건네세요
여러분 올해도 많이 힘드셨지요? 저처럼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연습을 하세요. 우리 ‘인생의 오후’는 저뿐 아니라 모두가 고생은 하면서 스스로를 위로하고 사랑하면 안 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살아왔어요. 부모를 위해, 자식을 위해 살아야 하고 나를 위해 뭔가를 하면 안 되는 줄 알고 말이죠. 저는 특히 수녀니까 더욱 그랬죠. 그런데 그건 아니더라고요. 우선 자기를 사랑하고 위로할 줄 알아야 제대로 남도 사랑하고 위로할 수 있죠. 아까 말씀 드렸죠? 수기안인(修己安人).

인생은 부럽다가 부러움을 받기도 하는 것

원택 스님

1997년이었던가요, 갑자기 IMF를 맞은 게. 어느 날 고교 동창이 전화를 했습니다. “야, 스님아. 나 ○○다. 나 모가지 날아갔다. 이와중에 목 안 잘린 건 중(僧) 니 혼자뿐이네.” IMF 때 제 동창들이 대부분 56~57세였습니다. 직장에서 임원 하는 친구도 있었는데 이 친구들이 몽땅 그만둔 겁니다. “니, 잘리면 제일 먼저 뭐가 정신이 번쩍 드는지 아나? 자식새끼들이다. 니는 잘리지도 않고 현직(現職)에 있고, 자식도 없으니 얼마나 좋노?”
제가 대학 졸업 후 출가하겠다고 했을 때 무척이나 말리던 친구들 이었습니다. 제가 성철 스님 시봉한다고 만날 맞고 있을 때 그 친구들은 사회에서 한 계단씩 올라가면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지요. 학교 다닐 땐 저보다 공부 못하던 놈들도 잘나가고 있었습니다. 이른바 TK가 잘나가던 시절이니 경북고 출신들이 어땠겠습니까. 솔직히 조금 부러울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25년 만에 인생이 역전된 셈이었습니다. 17년 전에 그 모양이었으니 지금까지 현직에 있는 건 당연히 저 혼자뿐이죠. 이젠 그 친구들이 저를 부러워하고 있습니다.

삶의 무게와 책임만큼 세상에 더 무거운 게 있을까요?
부모 형제를 버리고 출가하는 이들의 목표는 거의 하나입니다. 깨치는 것이지요. 저 역시 그랬습니다. 1972년 그날, 해인사 백련암 돌계단을 탁 밟으면서 다짐했습니다. “내 도인(道人) 되기 전엔 이 계단을 안내려간다. 최고의 길이 있다는데 그걸 경험해야지.” 하지만 42년이 흐른 지금 돌아보면 제 인생은 큰스님(성철 스님, 이하‘스님’) 말씀대로라면 ‘완전히 헛방’이요 ‘고름 닦은 휴지 꼴’입니다. 42년 전 스님이 “도인(道人) 돼라”고 이끌어주신 그 길을 못 갔으니 말입니다. 스님은 생전에 한 번도 저에게 “내 뒤치다꺼리해라”고 하신 적 없습니다. 지금도 귓가에 “이 미련한 곰 새끼” “밥도 못 빌어먹을 놈” 하는 스님의 호통이 들리는 듯합니다. 그러나 후회는 없습니다. 저 같은 바보, 곰 새끼가 아니었으면 우리 스님은 책 한 권 못 남길 뻔하지 않았겠습니까.
제 인생이 이 모양으로 된 것은 스님 만년에 잘못 드린 진언 때문입니다. 하루는 안마를 해드리면서 “스님, 서울에 가보니 아무도 스님을 모릅디다. 인재 양성에 힘쓰셔야겠습니다” 했던 것이지요. 누워 계시던 스님이 벌떡 일어나 귀싸대기를 올려붙이셨습니다. 뒤에 생각하니 제가 스님의 역린(逆鱗)을 건드린 꼴이었습니다. 안 그래도 향곡 스님은 진제 스님을, 전강 스님은 송담 스님을 제자로 삼아 어깨에 꽤 힘주고 계시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 판국에 스님은 이렇다 할 제자가 없어서 그게 속상하셨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며칠 후에 방법을 바꿨습니다. “스님, 책을 내시지요. 어록을 번역해 내시면 스님의 돈오돈수에 대한 울타리도 되지 않겠습니까.” 이번엔 잠시 생각하시더니 귀싸대기 대신에 “그건 말 되네” 하셨습니다. 그러시더니 작업을 시작하셨습니다. 1988년쯤 스님의 구술로 원고가 완성됐습니다. 법정 스님의 도움으로 스님의 책 <본지풍광>과 <선문정로>가 세상에 나오게 됐습니다. 스님의 <백일법문>(1967년 해인총림 초대 방장으로 추대된 성철 스님이 동안거 100일 동안 불교의 역사와 선불교의 핵심을 강의한 법문)도 잇따라 책으로 나오게 됐습니다. 그렇게 스님의 어록을 모두 정리한 ‘선림고경총서’가 1993년 9월 완성됐습니다.
스님 돌아가시기 두 달도 안 남은 때였습니다. 스님은 그 책을 받아보시곤 “이제 밥값 했다”며 좋아하셨습니다. 저도 그 모습을 보고, 또 두 달 뒤 스님이 돌아가시자 ‘아, 이젠 나도 스님 시봉 그만하고 내 공부 좀 해볼 수 있겠구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날부터 지금까지 그 무게 없는, 한없는 무게를 지고 살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해도 해도 계속 스님 일을 할 게 나옵니다. 생전에 냈던 책도 돌아보면 또 고칠 것이 나옵니다. 얼마 전에는 <백일법문> 개정 증보판을 냈습니다. 주변에선 저보고 “곰탕 좀 그만 끓여라”는 분도 있습니다. 계속 은사를 우려먹는다는 뜻이지요. 저는 스스로 깨치는 길을 가지는 못했지만, 우리 스님을 알리는 일에는 꽤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건 우리 스님이 확실히 깨치신 분, 확실히 보배를 갖고 계셨던 분이라는 흔들리지 않는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은 내 삶에서 기인하지요
<헤이데이>에서 독자들에게 전하는 위안의 말씀을 부탁받았습니다. 하지만 저야말로 위로받아야 할 사람입니다. 나이 칠십이 되도록 원래 출가할 때의 목표인 도인 근처에도 못 가고 이렇게 빌빌대고 있으니 말입니다. 젊어서는 그러지 않았는데 요즘 들어서는 부쩍 혼자 있다는 것이 외롭고 허전하고 그렇습니다. 그 전에는 뭐든 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는데 요즘에는 자신감도 확 줄었습니다. 지금 50대, 60대 분들은 건강하게 오래 사는 복을 누리기 위해서 미리미리 준비하십시오. 건강뿐 아니라 경제적 준비까지 다 하셔야 합니다. 중이 경제적 준비까지 하라고 하니 좀 이상하게 들리실 겁니다. 하지만 제 친구들을 보니 이건 정말 필요한 일입니다. 나라에서 아무리 복지를 잘 해준다고 해도 나 스스로 준비한 것만 하겠습니까. 물론 마음공부도 해야 합니다. 주변에서 보면 술 담배 다 하고 살다가 병에 걸린 분들보다 정말 깔끔하고 깨끗하게 생활하던 분들이 병에 걸리면 더 쉽게 절망하고 포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억울한 거지요. ‘내가 평소 그렇게 노력했는데도 병에 걸리다니’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흔히 인명재천(人命在天)이라고 하지요. 인간의 수명은 하늘이 결정한다고 합니다. 손해본다는 생각은 버리세요. 긍정의 힘을 가지고 자기를 잘 이겨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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