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yday 11월호의 인물 <박상원>

기사 요약글

그는 ‘직선 같은’ 사람이었다.

기사 내용

박상원(사진)

선한 웃음과 신뢰감이 묻어나는 말투. 배우 박상원은 늘 반듯한 정장 차림의 신사 이미지였다. 검사, 기업가, 재단 이사장 등 그가 맡은 대다수의 배역은 대개 묵직하고 진지한 데가 있으며 <그것이 알고 싶다> 같은 시사 교양 프로그램을 진행할 때나 ‘침대는 과학’이라며 광고에 등장할 때 역시 그는 ‘직선 같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뮤지컬이나 연극에 출연한 그의 모습을 보면 얘기가 좀 달라진다. <브로드웨이 42번가> 에서 신나게 탭댄스를 추거나 연극 <레인맨>에서 책가방을 끌어안고 자폐증 연기에 몰입한 그를 봤다면 말이다. 그는 TV와 뮤지컬, 연극을 넘나들며 꾸준히, 그리고 성실하게 다양한 스펙트럼을 표현해왔고 그 열정은 50대 중반에 접어든 지금도 여전히 그를 펄펄 끓게 만들었다. 낯선 여행지에서 늘 자신에게 편지를 쓰며 스스로 질책과 칭찬, 계획과 다짐을 반복해왔다는 박상원. 그의 내밀한 세계가 궁금했다.

나잇살을 고민하는 분들이 많은데 몸에 군살이 전혀 없어서 감탄했어요.
나잇살이야 저도 잘 붙죠. 그런데 ‘어쩔 수 없지’ 하고용인할 수 있는 직업이 아니니까 조금 쪘다 싶으면 마인드 컨트롤하면서 관리해요. 평소에 꾸준히 수영도 하고 있고요.

배우 생활이 올해로 37년째인데 그렇게 관리하는 게 피곤할 때도 있겠죠?
배우로서 숙명이죠. 늘 준비하고 가다듬어야 하는 게 당연해요. 꼭 경기하러 사각 링 안에 걸어 들어가는 격투기 선수의 심정과 비슷하게 카메라 앞이나 연극 무대에 서요. 관객들이야 편한 마음으로 즐기면 그만이지만 배우는 절대 그렇지 않거든요. 드러내고 평가받는 자리인데 어떻게 편할 수가 있어요. 어떻게 보면 처절할 정도로 스스로 제어하는 면이 많은데 그 과정에서 나름의 재미나 의미를 찾다 보면 또 괜찮아요.

가령 어떻게요?
배우로서 일을 즐길 수 있도록 감수성을 기르는 거죠. 틈틈이 그림도 그리고, 사진도 찍고, 여행도 다니고, 봉사도 하면서, 다방면에 걸쳐 하고 싶은 일들을 하는 게 도움이 되더라고요. (취미 정도로 소개했지만 사실 틈틈이 사진전을 열었던 그는 실력을 인정받아 80년이 넘은 일본의 한 미술협회로부터 상을 받기도 했다) 직업적으로 늘 남의 선택을 받는 입장이다 보니 다른 연기자들은 일이 없으면 초조하고 불안해하는 경향이 있는데 저는 오히려 반대예요. 가능한 여유가 주어지는 대로 여러 일을 시도하려고 해요. 책 쓰기, 목공예 가구 만들기 등 하고 싶은 일이 아주 많아서 탈이죠.(웃음)

보통 나이가 들면‘발산’보단‘수렴’에 가까워지는데 반대네요.
나이 때문에 위축될 필요는 하나도 없는 것 같아요. 요즘 어디서든 열정, 열정 하죠. 너무 자주 듣다 보니 이젠 식상할 정도인데 저는 언제 어디서든 절대로 머리와 가슴에서 이 단어를 떼놓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손만 뻗으면 닿을 만한 거리에 늘 열정을 둬야 하는 거죠. 그게 뭐 별거냐 싶어도 사람은 결국 생각대로 몸이 움직이게 되어 있어요.

의식은 그렇게 다잡을 수 있지만 예전 같지 않은 신체적인 변화에 직면하면 마음이 흔들릴 것 같아요.
물론 그런 게 있죠. 옛날에는 머리카락이 뻣뻣해서 돼지 털 같았는데 나이가 드니 가늘고 잘 빠지면 아무래도 자신감에 훼손을 입죠. 하지만 참 오묘한 게 신체적인 에너지가 약해지는 만큼 정신적인 면은 강해지더라고요. 그건 살아온 시간만큼 지혜나 경험이 쌓이기 때문인 것 같아요. 예전에는 같은 일을 해도 귀찮고, 꼭 누가 시켜서 하는 기분이 들었는데 요즘은 매 순간순간 나름의 가치나 의미를 부여하면서 즐겁게 받아들이고 있어요. 들여다 보고 있던 거울이 투명한 유리로 변한 것처럼 이제 내 얼굴만 보는 게 아니라 유리 너머에 있는 다른 여러면들을 볼 수 있게 된거죠. 그런 점에서 보면 중년은 성숙의 결정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무료한 시간을 보내는 나만의 방법이 있나요?
사색을 하면 시간이 참 잘 가요. 보통 사색이라고 하면 조용한 곳에서 혼자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저는 늘 많은 사람들과 함께 있는 환경에서 지냈기 때문에 주위 여건과 상관없이 사색에 빠져들 수 있어요. 백 명의 사람들 속에서도 혼자 점프해 생각하는 훈련이 돼 있는 거죠(웃음). 아까 화보 촬영 중에도 잠깐 옷을 갈아입으러 가면서 많은 생각을 했어요. 그 짧은 순간에도 사소하지만 그냥 흘려보내기엔 아까운 소중한 생각이 드는 거죠.

대본, 팬레터를 하나도 버리지 않고 영종도 별장에 모아두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심지어 대본에는 출연을 결정한 시간을 분 단위까지 적었을 정도라고요?
그것 역시 순간순간의 가치나 의미를 그냥 지나치지 못해서죠. 그런 자료를 보면서 지나온 세월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데, 뿌듯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고 뭐 다 그렇죠.

구형 폴더폰을 쓰네요? 스마트폰이 가족관계나 사람들의 감정에 돌이킬 수 없는 선을 그어 병들게 만들었다고 지적한 적이 있죠. 그만큼 아날로그적인 것들을 좋아하나 봐요.
그런 편이죠. 저는 메일을 써본 적이 한 번도 없어요. 그 대신 손 편지를 쓰죠. 며칠 전에도 직접 우표 붙여서 편지를 보냈어요. 그런 방식이 편해요.

누구에게 보내는 편지를요?
주로 아내, 아이들, 그리고 저한테 편지를 써요.

본인에게 직접 편지를 쓴다고요?

박상원(사진)

네. 저에게 편지를 쓰고 보내는 일은 제 인생의 일부예요. 1988년도부터 썼는데 지금 2박스 정도 모였어요. 이탈리아, 아프리카, 프랑스 등 어떤 나라를 여행할 때마다 그곳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엽서, 편지지, 사진, 그림을 골라 앞으로의 나에게 편지를 쓰는 거죠. “박 형, 며칠 뒤 한국에 들어가면 어떤 작품에 들어갈텐데 열심히 해요”라든가 “박 형, 그때 그렇게 하는 게 아니었어” 라든가 읽어보면 자책, 칭찬, 격려 등 내용도 참 다양해요(웃음). 나중에 편지를 받아보면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를 비교해 볼 수 있어 참 좋더라고요. 누구든 한 번쯤 시도해보면 좋을 것 같아요

외국엔 봉사 활동으로도 자주 가시죠. 올해만 해도 우즈베키스탄, 우간다, 몽골, 캄보디아 등 여러 나라에서 봉사 활동을 했더군요. 월드비전, 근육병재단, 다일공동체 같은 단체에서 20년 넘게 활동한 이력도 있고요. 봉사 활동을 열심히 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저는 살면서 자존심만큼 중요한 게 없다고 생각해요. 남에게 베풀 줄 아는 사람, 이름을 떠올렸을 때 향기가 나는 사람이 되는게 자존심을 지키는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인생을 마라톤에 비유하면 남보다 얼마나 더 빨리 좋은 기록을 내느냐보다 끝까지 완주했느냐가 더 중요한 것 같아요. 그러려면 속도보다 어떻게 달리느냐에 더 신경을 써야겠죠. 봉사에 대해 회의적인 분들도 계실테지만 저는 일단 사람들에게 ‘척’이라도 좋으니 먼저 시작해보라고 권합니다. 흉내를 내다 보면 결국 진지한 마음이 들고, 그러다 봉사의 참뜻을 깨닫기도 하니까요.

이문세,김혜자,차인표 씨 등 가까운 지인분들과 ‘나눔’이란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는것 같아요. 지난달 <헤이데이> 표지를 장식했던 엄홍길 대장님과도 훈훈한 인연을 맺어왔다고요?
2005년에 엄홍길 대장이 에베레스트 산을 오르다 사망한 후배의 시신을 수습하러 원정을 떠난 적이 있어요. 그때 직접 베이스캠프까지 찾아가 응원했었죠. 그 후 엄홍길휴먼재단을 창립했을 때 재단 이사를 맡게 됐어요. 네팔에 있는 어려운 아이들을 위해 학교를 짓고 기금을 조성하러 다니는 게 쉬운 일은 아닌데 그걸 마다하지 않고 열심히 하니 참 대단하죠. 그런 면에서 뜻이 맞았어요.

어느 인터뷰에서 연기상을 타는 것보다 아이들이 상장 하나 받아 오는 게 더 기쁘다는 말을 했어요. 집에서는 어떤 아버지세요?
너무 엄하지 않은 아버지예요(웃음). 철학자 장폴 사르트르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해요. “아버지가 아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일찍 죽는 것이다.” 극단적이죠? 사실 저는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에 생계형 인생을 살았던 시절이 있어요. 누가 일부러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눈치껏 본능적으로 사는 방법을 터득하곤 했죠. 굉장히 힘들었지만 반면에 얻는 것도 많았어요. 잡초 같은 생명력, 이건 인생을 살아가는 데 굉장한 경쟁력이거든요. 올해 성년이 된 아들과 고등학교 2학년인 딸이 그런 냉혹한 환경을 한 번도겪어보지 못했다는 점이 안타깝긴 해요. 헝그리 정신, 이건 말로 심어줄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사람에겐 저마다 전성기가 있기 마련이잖아요. 박상원의 전성기를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하겠어요?
전성기란 내 컨디션이 좋아서 최상의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때가 아닐까요? 그렇다면 오늘보단 내일이, 내일보단 모레가 전성기인 것 같아요. 하루하루 열심히 살며 좋은 기운을 얻고, 그렇게 얻은 기운이 날이 갈수록 커지니 매일매일이 금송아지를 맞는 기분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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