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영업 폭망하고 요양보호사로 재기 후 깨달은 교훈

기사 요약글

드라마틱한 하락과 반등을 거듭한 개인의 인생사를 통해, 실패에서 얻은 인생의 깨달음을 이야기한다.

기사 내용

 

 

그녀의 인생 그래프 

 

 

1989년 슈퍼마켓 오픈, 하루 최고 매출 100만원 찍으며 승승장구

1991년 건물주에게 가게 보증금 5천만 원을 사기당함 

2002년 건물주의 보증금 인상과 IMF 영향으로 슈퍼 접음

2003년 족발 가게 시작

2015년 경쟁 업체 출현으로 난항을 겪다 결국 폐업 

2019년 현재 요양보호사로 활동 중


 


 

 

  

#폭망의 교훈 1

 

동네에 슈퍼마켓을 차려 운영하던 부부에게 위기가 찾아온 것은 1991년, 건물주의 ‘사기행각’으로 가게 보증금 5000만원을 날리면서부터다. 당시에는 지금의 상가임대차보호법처럼 임대인을 위한 구제책이 없던 시절이라 비슷한 피해 사례가 많았는데, 목돈을 사기당한 뒤 어렵게 다시 보증금을 마련한 부부는 안전장치를 마련해야겠다는 생각에 새 건물주에게 전세 등기를 요구하는 등 나름의 자구책을 강구하기도 했다. 

 

원래부터 장사를 했었나요?

아니에요. 애들 아빠는 우유 회사에 다녔고, 저는 5년간 어묵 공장에 다녔어요. 시부모님에 두 아이까지 부양해야 했으니 남편 벌이만으로는 어려웠거든요. 그러다 애 아빠가 희망퇴직을 하면서 1989년에 동네에 슈퍼를 차렸어요.

마침 목 좋은 자리가 나왔고, 당시만 해도 슈퍼를 열면 빙과류다 생필품이다 물건을 납품하겠다고 안달인 업체들이 많았거든요. 월초에 물건을 받아 월말에 대금을 치르는 식이었죠. 경기가 좋은 시절이라 그랬는지 잘되는 날은 하루 100만원, 평균 하루 매출이 60만~70만원씩은 됐어요. 

 

금방 부자가 됐겠는데요?

사기를 당하는 바람에 오히려 주저앉았죠. 가게 차린 지 2년째 되던 해 건물주가 보증금 5000만원을 ‘해 먹고’ 도망가는 일이 생겼거든요. 얼마나 재주가 좋았는지 5층 건물을 담보로 여기저기서 수십억원을 빌렸더라고요.

지금은 상가임대차보호법 등으로 세입자의 보증금을 지켜주지만, 당시만 해도 그런 제도가 없어서 비슷한 사기 피해가 많았던 걸로 기억해요. 우리 건물에 입주해 있던 모든 세입자가 피해를 봤는데 저희가 가장 피해가 컸죠.

당시 (인근의) 20평대 아파트 값이 2000만~3000만원이었으니 5000만원이면 얼마나 큰 돈이에요. 남편은 머리 싸매고 드러누웠지만, 어떻게든 수습을 해야 했기에 살던 집을 담보로 5000만원을 대출받아 새 건물주에게 보증금으로 건넸죠.

같은 피해를 또 당할까 두려워 건물주에게 전세 등기를 해준다는 약속도 받아냈고요. 그때까지는 경기가 좋을 때라 2~3년 만에 대출금을 모두 갚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어요.

문제는 IMF 때부터였죠. 하루에 20만~30만원 팔기도 벅찬 날들이 이어지면서 몇 년을 근근이 버티다시피 했는데, 설상가상으로 건물이 또 다른 주인에게 넘어가면서 보증금이 두 배나 올랐어요. 결국 가게를 접을 수밖에 없었죠. 

 

하루아침에 수입이 사라졌네요?

그렇죠. 그때가 제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가 아니었을까 싶은데, 애들 아빠가 슈퍼를 접기 1년 전부터 투석을 했어요. 30대에 당뇨 진단을 받고도 식단 조절이나 운동을 게을리한 탓이죠.

일주일에 3일이나 투석을 해야 했는데, 보호자인 제가 병원을 다 따라다녀야 하니 하루 종일 매여 있어야 하는 슈퍼를 하기가 좀 그렇더라고요. 그래서 겸사겸사 슈퍼를 접었지만, 생활비는 벌어야 하잖아요.

오전엔 병원을 가야 하니 오후에만 할 수 있는 일을 알아보던 차에 동네 한 족발 체인점과 연이 닿았어요. 주인이 마침 가게를 내놓으려던 참이라 10만원을 주고 일주일 정도 들락날락하며 탐색전(?)을 펼쳤죠.

본사에서 완제품 형태로 족발을 보내주니, 특별한 요리 기술이 없어도 될 것 같았고, 오토바이 운전도 할 줄 아니 배달도 문제없겠더라고요. 무엇보다 저녁 장사라 오전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다는 점이 좋았어요. 그래서 보증금 500만원에 권리금 1000만원을 주고 가게를 넘겨받았죠. 

 

장사는 순조로웠나요?

네, 그런대로 생활비는 나왔어요. 잘될 때는 하루에 20개 정도를 팔았는데 그러면 10만원 정도가 순수익으로 떨어졌어요. 생활비는 충분히 됐죠. 혼자서 조리와 배달을 다 해야 했기 때문에 한번에 2~3개 이상의 주문은 받지 못했지만 이따금 오는 홀 손님까지 포함해 잘되는 달은 200만~300만원, 못 해도 150만원 정도는 늘 손에 들어왔어요.

물론 힘든 일도 많았죠. 배달 기다리는 동안 식욕이 사라졌으니 도로 가져가라는 손님도 있었고, 분명 보쌈을 시켜놓고 자기는 족발을 시켰다며 퇴짜를 놓는 사람도 있었어요. 오토바이가 고꾸라지는 사고를 당하거나 배달차에 뛰어들어 합의금을 요구하는 사기꾼도 만났고요.

 

 


 

 

 

#폭망의 교훈 2

 

그럭저럭 운영하던 족발 가게는 경쟁업체의 출현으로 하락세를 탔다. 본사로부터 완제품을 납품받는 식이라 특별한 요리 기술이 필요하지는 않았지만, 이 때문에 가게 고유의 경쟁력을 확보하지 못했던 것도 사실. 윤경순 씨는 만일 그때 특색 있는 메뉴나 서비스로 다른 집과의 차별성을 꾀했더라면 판도(?)가 달라졌을지 자못 궁금하다고 전했다.  

 

그렇게 10년간 해오던 족발가게를 그만둔 이유는 뭐예요?

2012~2013년부터 근처에 몇몇 족발 브랜드가 문을 열면서 서서히 매출이 떨어지더니 2015년에 들어서면서 아주 형편없어졌어요. 주문이 한 건도 들어오지 않는 날이 이어지면서 월세마저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됐죠.

매운 족발, 마늘 족발, 냉채 족발 등 특색 있는 족발을 다루는 식당이 늘어났으니 손님들 입장에서도 신선했을 것 같아요. 저는 본사로부터 ‘다 삶아진 족발’을 납품받아 데워서 재포장해 배달하는 일을 했기 때문에 편하긴 했지만, 그래서 평범한 족발 그 이상을 벗어나진 못했죠.

그때 체념하지 않고 족발과 어울리는 겉절이를 무쳐 함께 서비스한다든가 하는 식의 노력을 기울였다면 상황이 좀 더 나아졌을까 싶은 생각도 들어요.

하지만 그때는 설상가상으로 비가 오면 하수도가 역류할 만큼 건물이 망가졌는데도 모르쇠로 일관하는 건물주 때문에 열악한 환경에서 장사를 이어가야 했어요. 이러다 가게 보증금 500만원조차 떼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그때부터 월세를 내지 않았고, 결국 보증금을 다 ‘까먹고’ 나서야 미련 없이 가게를 정리할 수 있었죠. 

 

 


 

 

 

#폭망의 교훈 3

 

윤경순 씨는 시부모님을 봉양하는 한편, 아픈 남편과 여기저기 편찮았던 친정 부모님을 알뜰살뜰하게 돌봤다. ‘환자 케어’에 관해서는 베테랑이었던 셈. 그러나 결정적으로 자격증을 취득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처럼 요양보호사 자격으로 활발히 일할 기회를 얻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족발 가게를 그만둔 뒤 어떻게 생활했어요?

족발 가게를 하면서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따두어서 지금까지도 꾸준히 일을 하고 있어요. 가게를 하던 중간 남편과 사별했는데, 그러다 보니 오전에 마땅히 할 일이 없더라고요.

저녁 장사 전까지 아르바이트 삼아 잠깐 어르신들을 돌보면 되겠다 싶었죠. 시부모님, 친정 부모님을 가까이서 모셨으니 어르신들 대하는 데에는 자신이 있었고, 아픈 남편을 돌보며 환자 케어에도 요령이 붙었거든요.

하지만 자격증이 있어야 취업이 가능해서 관련 학원에 다니며 요양보호사 시험을 준비했어요. 보통 자격증을 따면 요양병원, 주야간보호센터, 일반 가정 등에서 일하게 되는데 저는 저녁엔 장사를 해야 하기 때문에 아침부터 저녁까지 매여 있는 일을 할 수는 없어서 몇 시간 단위로 끊어서 일할 수 있는 재가방문요양서비스를 하기로 했죠.

가게를 할 때는 하루 한 가정, 가게를 접고 나서는 하루 두 곳의 가정을 방문해 한 곳당 3시간씩 환자를 돌보고 있죠.

 

급여 수준은 어떻게 되나요 ? 

하루 3시간 기준, 주 5일이면 60만원을 받아요. 저는 두 집을 가니까 월 120만원 정도의 수입이 생겨요. 부지런한 분들은 하루 세 곳까지 가시기도 하는데, 저는 아이들도 다 독립한 상황이라 무리하진 않아요. 

 

일을 하면서 어려운 점은 없었어요? 

지금껏 5~6명의 어르신을 모셨는데 제가 인복이 있는지 그렇게 괴팍한 분은 못 만났어요. 더러는 식구들의 빨래를 시킨다거나 밭에다가 물을 주라는 식으로 환자의 케어와 전혀 관계없는 일을 요구하는 경우가 있다고 하던데, 요즘은 센터에서 환자나 가족들에게 요양보호사의 업무 범위를 정확히 설명하기 때문에 그런 오해는 없더라고요.

오히려 같은 식구처럼 오순도순 밥도 비벼 먹고, 어디 여행 간다면 슬그머니 1만원, 2만원씩 쥐어주시는 마음 따뜻한 어르신들을 만났죠. 환자의 특성마다, 방문하는 시간대에 따라 일이 약간 달라지긴 해요.

예를 들어 제가 가는 두 집만 해도 오전 집은 목욕 시켜드리기, 점심 차려드리기 같은 일을 하지만, 오후 집은 청소나 빨래, 어르신 말벗 같은 식으로 비슷한 듯 달라요. 이런 부분만 잘 염두에 두고 일한다면 보람도 있고 괜찮은 일인 것 같아요. 

 

 


 

 

#폭망의 교훈 4

 

나이가 들수록 의료비에 대한 지출이 늘어나게 마련. 젊은 시절 따로 대비를 해두지 못한 남편은 당뇨에 걸려 2억원의 치료비가 들었지만, 윤경순 씨는 ‘만일’을 대비해둔 덕분에 큰 수술을 받고도 병원비 걱정은 하지 않았다. 

 

어깨 부상으로  큰 수술을 받았다고요? 

어느 날부터 자려고 누우면 어깨에 큰 바위를 올려둔 것처럼 뻐근하니 아프더라고요. 참다 참다 병원에 갔더니 회전근개 파열이라는 진단을 받아 큰 병원에서 수술을 받았죠. 그때는 요양보호사 일도 잠깐 쉬었어요.

수술비에 재활치료까지 거의 2200만원이 들어갔는데, 실비보험을 잘 들어놔서 90% 이상 보전을 받았어요. 사실 보험이 이렇게 든든하구나 싶은 적이 몇 번 있었죠. 우리 남편 같은 경우는 보험이라면 질색을 했는데, 그래서 막상 당뇨 진단을 받고서는 온통 ‘내 돈’으로만 치료를 받을 수밖에 없었어요. 따져보니 10년 넘게 9개 과를 돌며 2억원 정도를 치료비로 썼더라고요.

저 역시 보험에 별로 신경을 못 쓰고 살았는데 2000년에 가족의 권유로 한 보험에 가입했다가 2년 뒤에 류머티즘 진단을 받았어요. 덕분에 치료비를 충당할 수 있었지만 실비보험 가입은 어려웠죠.

그런데 운 좋게 2011년에 제가 가입해둔 보험을 실비로 전환해주는 좋은 기회가 있었어요. 그 후 공교롭게도 같은 해 척추에 금이 가는 사고를 당했고, 2015년 허리 수술을 받았어요. 이것만 해도 1000만원이 넘는 큰 비용을 보장받을 수 있었죠.

 

호락호락하지만은 않았던 인생인데, 지금껏 잘 버틸 수 있는 힘은 무엇인가요?

결국 가족이죠. 남편이 당뇨를 앓으며 큰 고생을 했지만, 세상을 떠나고 보니 못 해준 것, 아쉬운 것만 생각이 나더라고요. 그러고 보면 존재 자체로 힘이 되는 게 바로 가족인 것 같아요.

남매를 기르느라 고생하는 우리 딸, 베트남에서 근무 중인 우리 아들이 다 제가 살아갈 수 있는 힘이에요. 그 옛날 어묵 공장에서 만나 지금까지 알뜰살뜰 저를 보살피는 친구도 든든한 버팀목이고요. 

 

행복을 느끼는  순간은 언제예요?

사는 게 너무 정신이 없어서 뭐가 행복일까? 고민해본 적도 없는 것 같아요. 품 안에 꼬물꼬물한 아들, 딸을 안고 있을 때였을까? 내내 시부모님을 모시고 살기도 했고, 애들 아빠도 몸이 안 좋았던 데다 주말도 없이 장사하느라 여행을 한번 제대로 못 갔어요. 오죽하면 대학에 간 딸이 지금껏 바다 한번 못 본 사람은 자기뿐이더라는 얘기를 하더라고요.

지금이 제일 행복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제일 자유롭긴 한 것 같아요. 그간 매여 있던 삶이 아까워서 저는 주말마다 신협 앞에서 출발하는 ‘당일치기 여행 버스’를 타요. 바다며, 산이며 자유롭게 다니는 요즘이 그저 좋네요.

  

 

기획 장혜정 사진 지다영(스튜디오 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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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눈동자
힘든 시기 거쳤는데도 포기하지 않고 새로운 도전을 택한 윤경순씨를 응원합니다.
2019.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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