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만화가를 다시 추억하다

기사 요약글

때론 익살스럽고 때론 가슴 뭉클하게 이야기를 건네던 만화가들. 그들과 함께 추억의 거리를 걸어봅니다.

기사 내용

 

“40년 가까이 마감에 쫓겨 살다 보니 시골 가서는 만화의‘만’자도 듣기 싫었어요. 물감엔 손도 안 댔죠. 근데 어제 그림을 부탁받고 물감 통을 열었더니 순간, 찡하더라고”

 

<고인돌>박수동마음 편한 지금, 그리고 여기

성냥개비에 먹물을 찍어 그린 에로틱한 분위기의 원시시대 캐릭터<고인돌>(사진)

만화를 그리고 싶어 네 번이나 직업을 바꾼 열정의 만화가 박수동. 명문 사범대를 졸업하고 교사로 일하면서도 만화가 꿈을 접지 못해 교편을 여러 번 놓았다. 1965년 잡지 <아리랑>의 신인 만화가 공모전에 준당선된 뒤 일간지 시사만화가로 활동을 시작한 그는 성냥개비로 그림을 그린다. 소설 <수난이대(受難二代)>로 유명한 하근찬 작가가 급해서 성냥개비로 글씨 쓰는 걸 보고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보통 문하생으로 시작하는 다른 만화가와 달리 독학으로 실력을 다진 박수동은 1972년 <선데이 서울>에 대표작 <고인돌>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성인만화 <고인돌>은‘성(性)’을 다루었지만 야하진 않았다. 오히려 은유와 풍자가 어우러진 그만의 유머가 담겨 있다. 그래서일까? 고인돌은 성인만화의 주인공임에도 빠삐코, 스크류바 등 아이스크림 TV 광고에 등장하며 대중들에게 친숙해졌다. 한창 전성기던 1970년대 1980년대엔 아동과 성인 만화 범주를 넘나들며 한 달에 연재만 40개에 달했다고 한다. 일에 파묻혀 살던 그 시절이 전혀 그립지 않다는 그의 말이 이해가 갔다. 충북 음성에서 아내와 고양이 여섯 마리를 키우며 살고 있는 지금이 가장 마음 편하고 행복하다. 처음엔 낯선 시골 생활이 어색해 새벽일찍 눈이 떠질 때마다 책을 읽었더니 모인 책이 꽤 된다. “마누라에게 농담처럼 죽기 전에 천 권만 읽어야겠다 했더니 대충 계산해도 90세까지는 살고 싶단 소리인데 참 욕심도 많다고 타박을 주대요. 허허.” 촬영 내내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고 몇 번이나 강조하던 그. 세월의 깊이만큼 매력이 짙어진 만화가 박수동은 참 멋졌다.

 

“전 아직 제 전성기가 오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여전히 전 빛이 날 둥 말 둥 한 사람이죠”

 

<악동이>이희재만화, 시대를 닮다

 

머리칼이 두 개밖에 없는 민머리 장난꾸러기 골목대장<악동이>(사진)

완도에서도 한참 더 들어가야 하는 섬마을 신지도, 그는 어렵게 만화책을 구해 읽던 어린 시절을 추억한다. 자신이 얼마나 만화를 아끼고 좋아했는지를 회상하는 만화가 이희재의 표정에는 뜨거운만화 사랑의 열정이 온전히 드러났다. 현재 한국만화영상진흥원 이사장으로 활동 중인 이희재는 제2의 전성기를 맞고 있다. 여성부와 공동으로 위안부 할머니 문제를 다룬 만화가 LA 교민축제에 초대받아 출국을 앞두고 있으며, 돌아오면 사흘 뒤에 중국에 가야 한다. 군사정권 시절부터 웃음과 환상보다는 현실에 대한 비판이 담긴 만화를 그린 사실주의 만화가 이희재. 명랑만화가 이정문과 시대극화의 대가 김종래의 문하생을 거쳐 만화계에 입문한 그의 실질적 데뷔작은 1981년에 발표한 <명인>과 <억새>다. 1983년에 어린이 만화잡지 <보물섬>이 창간되면서 그의 대표작<악동이>가 탄생했다. <소년중앙> 부록판으로 6년 더 연재될 정도로 인기를 끈 만화 <악동이>는 당시 군부독재 아래 숨막히는 현실을 패러디했다. 그 후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 <아홉살 인생> 등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한 만화도 다수 발표했고, 10권 전집인 <이문열 이희재 만화 삼국지>로도 인기를 얻었다. 이희재는 그간 이모저모 학습하며 기본을 닦기는 했지만 스스로 아직 빛나는 별은 아니라 말한다. “빛이 날 둥 말 둥 한 사람이죠. 60~70대가 되면 좀 더 모양을 갖출 거라 생각해요.” 여전히 만화를 그리는 순간이 가장 기쁘고 행복하다는 이 사람, 그는 천생 만화가다.

 

“사람이 백 년을 살면 전 지금 인생의 반을 산 거잖아요. 이젠 좀 다른 일을 해보고 싶어요. 전 세대가 함께 볼 수 있는 동화 같은 걸 그려보고 싶어요”

 

<아르미안의 네 딸들>신일숙만화에 순정을 바치다

가상 왕국 아르미안 왕가의 마지막 네왕녀의 삶을 다룬 순정만화<아르미안의 네 딸들>(사진)

가상 왕국 아르미안 왕가의 마지막 네 왕녀의 삶을 다룬 순정만화 <아르미안의 네 딸들>은 만화가 신일숙 그림의 변천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86년 연재를 시작하여 출판사를 바꿔가며 10년 만인 1996년에야 완결되었기 때문이다. 작가 특유의 낭만적 그림체로 1990년대를 풍미한 신일숙은 그리스, 로마, 이집트, 페르시아 등 주로 고대 배경의 판타지나 역사물을 그린다. 게임원작이 된 동명 만화 <리니지>를 작업한 1991년에서 2003년까지는 자신이 하고 싶은 걸 마음껏 펼쳐본,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팔 인대가 끊어져 재활치료를 받아야 했던 힘든 시기도 있었지만 자신을 아껴주는 팬들의 성원에 힘입어 계속 만화를 그릴수 있었다고. “제 만화를 읽던 이들이 절 기억해서 찾아주는 게참 감사해요. 애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없으면 하기 힘든 일이 만화거든요.” 디지털 시대를 맞이하면서 출판 만화가 큰 변화를 겪고 있는 요즘은 더욱 그렇다. 만화 환경이 크게 나아지지 않아 자신의 욕심을 내려놓게 된다는 그녀. 웹툰은 다양한 만화 독자를 형성했지만 한편으론 만화 콘텐츠는 무료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부작용을 낳았다. “예전에 비해 쉽게 만화를 발표할 순 있지만 늘 수입으로 연결되진 않아요. 만화가가 직업이 아닌 취미밖에 될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까워요.” 그래도 그녀는 지난 5월 레진코믹스에 앱툰 <불꽃의 메디아>를 연재하는 등 변화의 흐름에 잘 대응하고 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애니메이션을 챙겨 보고 고양이 여섯 마리와 동거동락한다는 만화가 신일숙. 그녀는 자신이 사랑한 아테네 여신만큼이나 당당하게 자기 길을 찾아가고 있다.

 

“만화가가 살아남는 유일한 길은 만화에 얼마나 많은 애정을 가지고 있느냐에 달렸어요. 전 만화가 정말 좋았어요”

 

<독고탁> 이상무마침표 없는 만화 사랑

1970~80년대 가장 큰 인기를 누렸던 야구 만화 캐릭터<독고탁>(사진)

 

“형님은 1970년대 1980년대에 아주 독보적인 존재였어요. <독고탁>으로 많은 이들에게 감동과 공감을 이끌어냈죠.”

자신을 치켜세우는 동료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쑥스럽다며 손사래 치는 만화가 이상무. 정말 그랬다. 1971년 까까머리 독고탁이 등장하자 사람들은 열광했다. 정의롭거나 멋져서가 아니다. 말썽쟁이에 가까웠지만 사람들은 현실적인 캐릭터에 빠져들었다. 야구를 소재로 한 만화 <독고탁>은 대본소(돈을 내고 책을 빌리거나 볼 수 있는 곳) 체재 아래 시리즈 형식으로 발표되면서 사람들의 궁금증을 자극했다. 1970년대 후반부터 어린이 잡지가 다수 등장하면서 잡지 연재도 늘었다. “제가 원래 스포츠를 좋아해요. 직접 야구나 테니스도 해보면서 작품에 반영하고, 스포츠지에도 연구를 많이 했어요.” <독고탁> <달려라 꼴찌> 등 스포츠 중에서도 특히 야구를 좋아한 그의 이야기 중심에는 자주 가난한 주인공이 있었고, 당시 평범한 보통 사람들의 삶을 다루는 그의 작품엔 감성이 살아 있었다. 이상무는 2009년부터 골프 전문 만화가로 활동 중인데, 유일하게 책으로 배울 수 있는 스포츠가 골프란다. 그 역시 오프라인 만화 시장이 죽어가는 현실에 안타까움을 내비치면서 만화는 어떻게든 인간과 같이 가는 거라며 나름대로 자리를 잡아갈 거라 믿는단다. “예전에 대학에서 1년 정도 강의한 적이 있는데 제가 이런 말을 했어요. ‘만화가가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지는 열정에 달렸다. 누가 더 많은 애정을 가지고 있느냐다.’ 우린 정말 만화를 좋아했어요. 지금까지도 만화를 붙들고 늘어지는 게 다 사랑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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