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영하가 여행을 떠나는 이유

기사 요약글

보통은 목적지를 고심하지만 한번쯤은 우리가 여행을 떠나는 본질적인 이유에 대해 고민해보면 어떨까? 김영하 작가의 여행 에세이 <여행의 이유>에서 미리 그 답을 엿봤다.

기사 내용

 

 

작가 김영하.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 나가는 셀럽급 소설가 중 한 명으로 1995년 <리뷰>라는 작품으로 등단해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오빠가 돌아왔다> <검은 꽃> <살인자의 기억법> 등 다수의 히트작을 출간했다. tvN 예능 프로그램 <알쓸신잡>을 통해 대중적 인기와 함께 이 시대의 ‘뇌섹남(뇌가 섹시하다는 뜻으로 똑똑한 남자를 일컫는 유행어)’으로 등극했으며, TV 출연, 강연, 책을 통해 독자들과 소통하고 있다.

이번 신작 <여행의 이유>(문학동네)는 2005년, 중국에 입국했다 비자를 챙기지 못해 추방당했던 일화에서부터 시작해 그간 김영하 작가가 겪었던 여러 여행에 관해 조근조근 얘기가 펼쳐진다. 그 과정에서 책의 제목이기도 한 여행의 이유와 목적에 대한 김영하 작가의 예리한 통찰력이 빛나는데, 읽다 보면 ‘여행지에서 이런 기분이 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구나’ 하는 깨달음이 들 때가 있다. 그간 막연하게 느꼈던 여행의 즐거움, 새로움의 실체(?)에 다가서는 기분. 읽고 난 후 여행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질 것만은 확실하다.

 

 


 

 

기대와는 다른 현실에 실망하고, 대신 생각지도 않던 어떤 것을 얻고, 그로 인해 인생의 행로가 미묘하게 달라지고, 한참의 세월이 지나 오래 전에 겪은 멀미의 기억과 파장을 떠올리고, 그러다 문득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알게 되는 것. 생각해보면 나에게 여행은 언제나 그런 것이었다. 

(중략)

파리에 대한 환상으로 여행을 떠난 일부 일본 여행객들은 파리가 자신들이 상상하던 것과 매우 다르다는 데 심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개똥을 치우지 않는 주인들, 지하철 개찰구를 통과하자마자 아무데나 표를 던져버리는 승객들, 외국인에게 쌀쌀맞은 점원들,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온갖 불쾌한 냄새들.

(중략)

오랫동안 품어왔던 멋진 환상과 그와 일치하지 않는 현실. 여행의 경험이 일천한 이들은 마치 멀미를 하듯 혼란을 겪는다. 반면 경험 풍부한 여행자들은 눈앞의 현실에 맞춰 즉각적으로 자신의 고정관념을 수정한다.

_ 추방과 멀미 中

 

누군가가 히말라야의 8,000m급 고봉에 올라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안전하게 귀환하는 것을 반복하듯이, 나는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로부터 거부당하지 않고 안전함을 느끼는 순간을 그리워하는데, 그 경험은 호텔이라는 장소로 표상되어 있다.

(중략)

‘집 떠나면 고생’이라는 말을 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내 안의 프로그램은 어서 이 편안한 집을 떠나 그 고생을 다시 겪으라고 부추기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 어디로든 떠나게 되고, 그 여정에서 내가 최초로 맛보게 되는 달콤한 순간은 바로 예약된 호텔의 문을 들어설 때다. 벨맨이 가방을 받아주고 리셉션의 직원은 내 이름을 알고 있다. ‘나는 다시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이제 한동안은 안전하다.’ 평생토록 나는 이 패턴을 반복하고 있다. 1) 낯선 곳에 도착한다. 두렵다. 2) 그런데 받아들여진다. 3) 다행이다. 크게 안도한다. 4) 그러나 곧 또 다른 어딘가로 떠난다.

(중략)

호텔을 좋아하는 이유는 또 있다. 호텔은, 너무 당연한 말이지만, 집이 아니다. 어떻게 다른가? 집은 의무의 공간이다. 언제나 해야 할 일들이 눈에 띈다. 설거지, 빨래, 청소 같은 즉각 처리 가능한 일도 있고, 큰맘 먹고 언젠가 해치워야 할 해묵은 숙제들도 있다. 집은 일터이기도 하다. 나는 컴퓨터 모니터만 봐도 마음이 무거워진다. 아니, 책꽃이에 꽃혀 있는 책들만 봐도 그렇다. 책들은 언젠가는 하지 않으면 안 될 일, 그러나 늘 미루고 있는 바로 그 일, 글쓰기를 떠올리게 한다. 내가 소파에 누워 있는 순간에도 다른 작가들이 부지런히 멋진 책들을 쓰고 있다고, 그러니 어서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쓰라고 질책하는 것만 같다.

오래 살아온 집에는 상처가 있다. 지워지지 않는 벽지의 얼룩처럼 온갖 기억들이 집 여기저기에 들러붙어 있다. 가족에게 받은 고통, 내가 그들에게 주었거나, 그들로부터 들은 뼈아픈 말들은 사라지지 않고 집 구석구석에 묻어 있다. 집은 안식의 공간이(어야 하)지만 상처의 쇼윈도이기도 하다. 그래서 가족간의 뿌리 깊은 갈등을 다룬 소설들은 어김없이 그들이 오래 살아온 집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_ 상처를 몽땅 흡수한 물건들로부터 달아나기 中

 

내가 여행을 정말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불안, 우리의 현재를 위협하는 이 어두운 두 그림자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여행하는 동안 우리는 일종의 위기 상황에 처하게 된다. 낯선 곳에서 잘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먹을 것과 잘 곳을 확보하고 안전을 도모해야 한다. 오직 현재만이 중요하고 의미를 가지게 된다.

_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여행 中

 

환대의 관점에서 지난 여행들을 돌아보면, 곳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불쑥 튀어나와 아무 대가 없이 도움을 주었다. 세계에서 가장 복잡한 지하철역으로 꼽히는 도쿄의 신주쿠역과 시부야역에서, 대중교통이 끊긴 프랑스의 노르망디에서, 발리의 우붓에서, 영어가 한마디도 안 통하는 멕시코의 유카탄반도에서 이름 모를 이들이 출구를 알려주고, 차를 태워주고, 종교 축제에 데려가고, 먹을 것을 나누어주었다.

(중략)

환대는 이렇게 순환하면서 세상을 좀더 나은 곳으로 만들고 그럴 때 진정한 가치가 있다. 준 만큼 받는 관계보다 누군가에게 준 것이 돌고 돌아 다시 나에게로 돌아오는 세상이 더 살 만한 세상이 아닐까. 이런 환대의 순환을 가장 잘 경험할 수 있는 게 여행이다.

_ 아폴로 8호에서 보내온 사진 中

 

여행은 분명한 시작과 끝이 있다는 점에서도 소설과 닮았다. 설렘과 흥분 속에서 낯선 세계로 들어가고, 그 세계를 천천히 알아가다가, 원래 출발했던 지점으로 안전하게 돌아온다. 독자와 여행자 모두 내면의 변화를 겪는다. 그게 무엇인지는 당장은 알지 못한다. 그것은 일상으로 복귀할 때가 되어서야 천천히 모습을 드러낸다. 내가 살던 동네가 다르게 보이고 낯설게 느껴진다. 주말 홍대 앞의 인파가 새삼 무시무시하게 느껴지고, 서울이 거대 도시라는 것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지하철이나 거리에서 다른 사람의 몸을 치고 지나가는 게 전과는 달리 불쾌하고, 한강은 평소보다 더 드넓어 보인다. 식당이 밀집한 거리를 지나갈 때면 한국 음식 특유의 향신료 냄새가 코를 찌른다.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감각들이 되살아난다.

_ 여행으로 돌아가다 中

 

 

기획 우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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