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대 명사 - 추억의 금메달리스트

기사 요약글

‘지도자’ 가 된 그들의 오늘이 더욱 근사한 이유.

기사 내용

인생에 한판승은 없다

 

김재엽 동서울대학교 경호학과 교수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유도 은메달,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 유도 금메달1988년 서울 올림픽 유도 금메달

유도 선수로서 절정기는 1983년 세계청소년선수권을 제패하면서부터 이미 시작됐고, 1984년 LA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따면서 이름을 온 세상에 알렸다. 다소 아쉬운 성적이었지만(은메달을 따서가 아니라 경기 내용이 만족스럽지 않았다) 이내 몸을 추스른 그는 1985년 유도월드컵과 1986년 아시안게임, 1987년 세계선수권을 차례로 제패했다. 그리고 마침내 1988년 올림픽 금메달을 거머쥐며 유도 그랜드슬램을 달성했고, 현역 시절 19개 금메달을 목에 건 선수로 세계 유도 역사에 큰 획을 그었다. 멋진 은퇴였지만 그 후 김재엽은 지도자로서 고질적 비리에 항거하다 유도계에서 퇴출을 당했고 연이은 사업 실패와 사기, 이혼과 대인기피증, 노숙 생활까지 파란만장한 인생사를 돌아왔다.

“학생들에게 1등만이 전부는 아니라고 얘기합니다. 늘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기회가 주어졌을 때 잡을 수 있는 물리적 정신적 준비야말로 나와 내 가족을 웃게 만들어주는 힘이 될 테니까요.” 동서울대학교 경호학과 교수로서 10년을 살아온 김재엽은 ‘자랑스런 올림픽 영웅’ 못지않은 ‘좋은 스승’으로서 인생이라는 긴 시합에 행복하게 달려들고 있다.


매일 꿈을 쏘는 활

김진호(사진)

김진호 한국체육대학교 체육학과 교수
1978년 방콕 아시안게임 개인전 금메달
1984년 LA 올림픽 개인전 동메달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 3관왕
국제대회가 열릴 때마다 ‘메달밭’ 노릇을 톡톡히 하는 대한민국 여자 양궁의 역사는 단언컨대 김진호에서 시작됐다. “중학생 때, 양궁부 언니들이 활 쏘는 모습을 우연히 봤는데 그 모습이 그렇게 멋지더라고요.” 호기심에서 시작된 소녀 궁사의 행보는 거침이 없었다. 지도자들조차 일본어로 쓴 교본을 보며 자세를 가르치던 시절, 1978년 방콕 아시안게임에서 개인전 금메달을 딴 데 이어 1979년 베를린 세계양궁선수권대회에서 5관왕을 차지했으니 그야말로 세계가 깜짝 놀랄 사건이었다. ‘신궁’ 김진호는 4년 뒤 열린 세계양궁선수권대회에서 다시 5관왕을 차지하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우며 세계 무대를 평정했다. 그러나 1984년 LA 올림픽에서 세간의 기대와 달리 동메달에 그쳐 한동안 방황하기도 했다.

“아무리 잘해도 마지막 세 발에서 실수하면 소용없는 게 양궁이에요. 엄청난 긴장과 어쩔 수 없는 고독을 극복할 수 있는 내면의 수양이 필요하지요. 바로 그것이 양궁의 진짜 매력입니다.”

플래시가 터지는 수백 대의 카메라와 천둥 같은 환호성 앞에서 흔들림 없이 10점을 조준하는 무아지경의 경지! 누구보다 화려했던 시절을 보내고 은퇴한 뒤, 모교인 한국체대에서 20년째 후배들을 가르치고 있는 그녀의 활은 하루도 쉬지 않는다. 양궁보다 인생을 가르치는 스승이 되고 싶다는 꿈을 매일 쏘아 올리고 있기에.


김택수 대우증권 토네이도 탁구단 감독(사진),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단.복식 동메달,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단식 동메달, 1998년 방콕 아시안게임 단식 금메달,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 복식 은메달

 

단 하나의 사랑으로

이보다 더 화끈한 사랑 고백이 있을까.

“저는 탁구에 미친 사람이에요. 탁구가 나 자신이고, 내가 그대로 탁구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어린 시절, 탁구를 만난 그 순간 완전히 반해버렸어요. 손의 미세한 감각, 라켓의 작은 움직임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작은 공의 매력에 완전히 압도당했지요.”

열일곱의 나이에 한국 탁구 사상 최연소로 국가대표에 선발된 이후, 십여 년간 태극 마크를 달고(네번의 올림픽과 세 번의 아시안 게임을 치러냈다!) 메달 수십 개를 따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순둥이’라는 별명과 어울리지 않는 강력한 파워와 완벽한 테크닉, 철저한 자기 관리와 성실함까지 갖춘 김택수는 ‘펜홀더의 교과서’로 20세기 탁구사에 당당히 자리매김했다. 1998년 방콕 아시안게임 결승전에서 보여준 32구 환상의 랠리는 지금도 전 세계 탁구 팬들을 달뜨게 만든다! 김택수라는 전설은 현재 진행형이다. 지금도 해외 경기에 나가면 현역 선수보다 더한 사인 공세에 시달리고, 국내의 한 스포츠용품 브랜드와 함께 론칭한 ‘김택수’ 라인은 탁구 동호인들이 가장 갖고 싶어 하는 명품 중의 명품이다. 2007년부터 친정 팀인 대우증권 탁구단의 감독을 맡아 꼴찌였던 팀을 4년 만에 정상에 올려놓으며 스타 선수 출신 감독이라는 무거운 짐을 가뿐하게 행복으로 승화시켰다. “세계 탁구의 흐름은 늘 변하고 있고 그것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한순간도 게을리할 수가 없어요. 어린 선수들이 스스로 선택한 탁구를 사랑하며 뛸 수 있도록 이끌어주고 싶습니다.” 현역 시절도 멋졌지만 ‘지도자’ 김택수의 오늘이 더욱 근사한 이유다.



“선수 시절에도 행복했지만 은퇴 후에 깨달은 것들이 많아요.
너무 많은 분들이 나를 응원해주고, 탁구라는 스포츠를 아껴주신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단순히 메달 개수를 늘리는 것보다 탁구를 진정으로 즐기는 이들이 많아지는 날을 꿈꿉니다.”

유영주 KDB생명 위너스 농구단 코치(사진),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여자 농구 금메달

 

두근두근,내 삶의 목표는 다시 새롭다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에서 당당히 금메달을 목에 걸었을 때 유영주의 나이는 스물셋이었다.
1997년 방콕에서 열린 아시아여자농구선수권에서 최우수선수상과 득점왕을 휩쓸며 절정의 기량을 선보였다.

“그때가 제 인생에서 가장 화려한 시절이었어요. 그런데 단순히 메달을 목에 걸고 MVP로 뽑혀서가 아니라 그즈음 비로소 농구를 즐기면서 그 맛을 알게 됐기 때문이에요.”

언니의 농구화를 신고 싶어서 시작한 농구였다. 그녀는 고등학교 졸업과 함께 앳된 얼굴로 실업 무대에 나서자마자 농구대잔치 신인상을 거머쥐며 스포트라이트를 독차지했다. 부상에 시달리고 팀이 해체되는 불운을 겪으면서도 유영주는 언제나 최고의 자리를 지켰다. 현역에서 물러난 12년 전 여자 선수 최초로 실업팀 지도자(감독 대행)가 됐을 때, 유영주는 새로운 목표를 세웠다. 여자로서 최초의 국가대표팀 감독이 되는 것! 12년 전의 시도에서 쓴맛을 봤던 그녀는 잠시 자리를 옮겨 해설위원으로 맹위를 떨치던 순간에도 절치부심했고, 지난해 다시 코트로 복귀해 구리 KDB생명 위너스 농구단의 코치로 첫 시즌을 마쳤다. “성적이 만족스럽지 않아요. 하지만 새로운 시즌은 정말 기대할 만합니다. 선수들과 함께 미친 듯이 뛰고 있으니까요!”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다시 태어나도 농구를 하겠다는 그녀는 바스켓을 향해 유쾌한 미소를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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