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한창’인 남자들, 오빠들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기사 요약글

자신만의 색깔과 향기로 인생의‘한창’을 정의하고 있는 남자들을 만났다.

기사 내용

나이 듦에 대한 찬사

홍요섭

 

“어렸을 때부터 다양한 것을 경험하며 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한 작품을 끝내면 어떤 때는 오지로 훌쩍 여행을 떠났고, 또 한 작품을 하고 나면 운동을 하거나 다른 것들을 하며 시간을 빼곡히 채웠습니다. 힘이 넘치는 20~30대에만 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고 믿었거든요.”

호기심 많고 도전 정신이 강했던 청년 시절부터 쌓은 다양한 경험은 홍요섭을 취미왕으로 만들었다. 특히 그는 알아주는 운동광이다. 20년 넘게 한 스쿠버다이빙은 관련 잡지를 낼 만큼 전문가로 정평이 나 있고 골프 역시 프로다. 그리고 지금은 승마에 심취해 있다.

“사실 승마는 십자인대에 말썽이 생기면서 재활을 위해 시작한 운동이었습니다. 배우 생활을 포기해야 하나 생각할 정도로 걸을 수조차 없었고, 그만큼 살이 쪄서 심적으로도 고통스러웠어요. 승마를 두 달쯤 하니까 살이 빠지면서 거짓말처럼 건강도 좋아지더라고요. 또 오랜 시간 타다 보니 말에게도 정이 붙잖아요. 제가 가면 말이 반가워하는 게 느껴지고 특별한 교감이 생기더라고요. 지금은 제 인생의 마지막 운동이라고 말할 정도로 푹 빠져 있습니다.”

건강 때문에 시작한 승마였지만 지금 그가 승마를 사랑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인생의 새로운 정의를 배웠기 때문이다. 말이 통하지 않는 동물이지만 살아 있는 생명과 함께한다는 건 서로의 이해가 동반되어야 한다.

“말은 타는 게 아니라 말이 나를 태워주는 거더라고요. 둘 중 하나라도 컨디션이 좋지 않으면 탈 수 없고, 말의 기분에 따라 완전히 달라지더군요. 감정을 주고받으며 이전에는 몰랐던 즐거움과 기쁨을 배우고 나니 사람과의 관계, 그리고 인생도 그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삶에 대한 새로운 감정을 깨달은 건 그의 인생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 영향은 인생의 중반을 넘어선 그에게 새로운 도전으로 이어졌다. 바로‘작아지는 연습’이다.

“20대, 30대에는 그때만 할 수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40대가 되면 그때만 가능한 일들이 있고요. 60대에는 삶을 줄이는 연습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일단 작은 집으로 이사를 갈 예정이고, 돈이나 일 욕심을 덜어 내는 연습도 하고 있어요. 사람은 누구나 끝이 정해져 있잖아요. 흙으로 돌아갈 때를 생각하면 많은 것을 내려놓아야 행복한 인생이었다고 느낄 것 같아요.”

작아지는 연습으로 얻고 싶은 최종 목표는 재미있게도‘잘 웃는 영감’이다. 70대, 80대에는 잘 웃는 것만으로도 주변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고.

“공원에서 운동을 하는 어르신들을 보면 하나같이 표정이 딱딱하고 비장해요. 분명히 건강하기 위해서 하는 운동일 텐데 표정이 행복해 보이지 않고 경직되어 있어요. 무서운 얼굴이면 사람들이 다가올 수가 없잖아요. 세대 공감까지는 아니더라도 잘 웃기만 해도 사람들과 잘 지낼 수 있지 않을까요? 잘 웃는 홍영감, 이게 제가 그리는 70~80대예요.”

그는 나이가 들수록 밖으로 많이 움직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꼭 건강 때문이 아니라 귀한 것을 찾아내기 위함이다. 이제 산에 가면 나무 냄새, 풀 냄새 등을 구분할 수 있다. 말에서 나는 냄새도 이전과는 다르게 맡을 수 있다. 젊었을 때에는 전혀 몰랐던 물 냄새도 알게 됐다. 모든 것이 둔해질 수밖에 없는 나이이지만 이런 소소한 느낌들은 밖으로 나갔을 때만 발견할 수 있는 보석이다.

“돈의 전성기, 젊음의 전성기만이 전성기일까요? 전 삶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고 또 바른 방향을 잡을 수 있는 지금이 전성기인 것 같아요. ‘생각의 전성기’랄까요?”

 


 

홍요섭은 1년에 한 작품, 2년에 한 작품, 그리고 숨을 크게 한 번 고르고 다시 한 작품, 조금 느린 걸음으로 배우의 길을 걸었다. 그리고 여성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던 젊은 시절의 서글서글한 눈매를 따라 새겨진 주름이 매력적인 60대가 되었다.

 

 

‘내려놓음’의 즐거움

이창훈
 


 

검게 그을린 피부와 탄탄한 근육이 요즘 이창훈의 근황을 대변하고 있었다. 35년간 피우던 담배를 끊고 1년 반 만에 14kg이 쪘다는 그는,“이창훈 닮았다”는 시민들의 얘기에 마냥 웃을 수가 없었다. 무작정 테니스장을 찾아간 게 2년 전, 하루 2시간 반씩 테니스공을 쳐댄 결과, 두 달 만에 13kg이 빠져 지금은 딱 보기 좋은 몸을 유지하고 있다.

“삶은 계란만 먹어가며 식단 조절하면 금방 빠지죠. 근데 머리도 같이 빠져요(웃음). 나이 드니까 굶는 다이어트엔 한계가 오더라고요. 두둑한 뱃살에 늘어지는 얼굴을 보며 이건 아니다 싶었는데, 확실히 몸을 다져놓고 보니 언제, 어느 작품이 들어와도 괜찮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생겨요.”

40대 초반, 아버지 역할을 제안받고 상심한 나머지 우울증을 겪기도 했지만 지금 그는 할아버지 배역을 준데도 즐거울 것 같다며 호탕하게 웃는다. 작가에게 “기왕이면 멋있는 아빠가 되고 싶으니 아들과 유도하는 장면을 넣어 달라”고 부탁할 만큼 여유를 갖게 된 그는 ‘내가 이창훈인데’ 하는 자만심을 내려놓고 나니 갑옷을 벗어버린 듯 자유로워졌다고 말한다. “제가 NG 안 내기로 유명했어요. 나는 스타니까 완벽해야 된다고 생각하며 늘 대본이 해질 때까지 연습했거든요. 그러면서도 촬영장에 와서는 여유 있는 척 책을 봤어요. 촬영에 들어가면 한 큐에 그 많은 대사를 소화하니 남들이 볼 땐 타고난 놈 같았겠죠? 인기가 높아지고 알아봐주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상황은 더욱 심각해졌어요(웃음). 나는 늘 바쁘고 여기저기 찾는 곳이 많아야 하는 사람인데 어느 순간부터 차츰 일이 줄더라고요. 지금 영화든 드라마든 출연하는 작품이 있어야 그 외의 인터뷰든 토크쇼든 떳떳하게 나갈 수 있다고 믿는 배우들이 있는데 제가 딱 그 부류였거든요. 그런데 이젠“뭐 어때?” 하며 여유가 생기더라고요. 대중의 입장에서 잘나가기도 하고 주춤하기도 하는 배우를 보는 게 훨씬 더 자연스럽지 않을까요?” 과거 그에게‘일’이란 연기뿐이었지만, 많은 걸 겪고 난 지금은 그 범위가 많이 확장됐다고 했다. 좋은 배역을 기다리며 운동을 하는 것, 하나뿐인 딸의 등교를 책임지는 것, 아내를 위해 요리를 하는 것 역시 인생의 중요한‘일’이라고 생각하니 출연하는 작품이 없다고 해서 의기소침해할 이유가 하나도 없더라는 것.

인생의 전성기에 대한 정의도 과거와는 완전히 달라졌다. 예전 같으면 방송 3사의 대본이 밀려들던 20~30대를 전성기로 꼽겠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밤새 대본을 외우며 NG에 대한 강박을 키우던 그때가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고 했다. 오히려 동네 주민들과 인증 사진도 찍고, 테니스 회원들과 호형호제하며, 한 장에 7천원짜리 티셔츠를 입어도 마음이 편한 지금이 인생의 전성기가 아닐까 싶다고. 앞으로 이루고 싶은 꿈이 하나 있다면 연기 지도를 하는‘스승’이 되는 건데, 여의치 않으면 붕어빵 장사나 토스트 장사를 해도 전혀 관계없다며 푸하하 웃어버린 그다.

만 51세, 벌써 중년에 접어든 그가 ‘남자의 멋’에 대해 어떤 정의를 내릴까 궁금했는데 뜻밖에도 가족 이야기부터 꺼낸다.“제가 마흔한 살에 결혼해 마흔두 살에 아빠가 돼서 가족 사랑이 좀 유난해요. 우리 딸이 ‘아빠~’ 하고 와서 안기는 순간, 집사람과 다정하게 얘기하고 있는 순간 문득문득 내가 좀 멋있는 남자처럼 느껴지거든요. 젊을 땐 잘생기고 옷 잘 입는 남자가 최고였지만 중년엔 자기 가족 잘 건사하고 뛰어든 일에서 성과를 내는 남자가 멋있잖아요. 그만큼 훨씬 더 깊고, 이루기 어려운 게 중년의 멋인 것 같아요.”

 


 

나이가 들고 무엇보다 한 아이의 아빠가 되면서“뭐 어때? 사람이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지” 하는 여유가 생기더라고요.

 

 

멜로디가 있는 삶

홍일권


 

홍일권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그간 쉴 새 없이 연기를 했지만 최근 출연한 예능을 통해 큰 주목을 받게 되면서 ‘왜 이제야 나타났냐’는 반응들이 이어졌던 것. 능숙한 솜씨로 피아노, 기타, 색소폰을 연주하는가 하면, 다정다감하게 요리를 준비하는 모습이 방송을 타면서‘여심 저격’‘매력 부자’ 같은 애칭이 생겨나고 있다. 쑥스럽고 어색하다며 소년 같은 미소를 짓고 있는 그는 원체 자기 PR이나 자랑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그저 묵묵히 내 할 일을 하면 족하다는 태도로 일관해왔다. 이건 그의 취미 생활에서도 잘 드러난다.

“색소폰, 기타, 피아노 연주를 정말 좋아해요. 색소폰은 소리가 너무 커서 새벽에 한강공원에 나가 혼자 연습하고 들어올 때가 많죠(웃음). 혼자 연주하며 즐길 때가 많지만, 다른 악기들과 호흡하는 재미를 빼놓을 순 없어요. 이 분야‘프로’들과 인연을 맺을 기회가 꽤 있는데 그분들과 합주를 할 때가 있단 말이죠. 어떤 음악을 어떻게 연주하자고 약속한 적이 없어도 누군가 먼저 연주를 시작하면 하나하나 화음을 얹고, 멜로디를 맞추는데 그때 느껴지는 희열이 있어요. 말 한마디 안 하고 소통하는 기분이랄까요? 그 순간만큼은 고민도 스트레스도 다 날아가버리죠. 누구에게 보여주고 싶어서 연주하겠다는 생각은 별로 안 해봤어요. 그래서 방송에서 연주하는 모습을 보여 달랬을 때 고민이 많았는데 다른 한편, 누구든 살면서 악기 하나쯤 다루는 여유를 가졌으면 좋겠다는 메시지를 드리는 것도 좋겠다 싶어서 마음을 바꿨어요. 쟤도 하는데 나라고 못 할까? 악기 연주가 정말 그렇게 즐거워? 뭐 그런 마음이 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요.”

전문 세션들과 합을 맞출 정도의 실력을 갖췄지만, 놀랍게도 그는 색소폰이나 기타 연주를 따로 배운 적이 없다. 어릴 적 배웠던 피아노 연주를 떠올리며 한 발짝 한 발짝 나아가다 보니 어느 날은 소리가 나고, 어느 날은 그런대로 멜로디가 되더라는 것. 지금의 색소폰 실력을 갖추기까지 20년이 걸렸다니 그의 우직함이 짐작되고도 남는다. 유난히 음악을 좋아하시던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다는 그는“음악은 평생의 좋은 친구”라는 말로 그 가치를 설명했다.“자기 업에 충실한 게 기본이겠지만 그렇다고‘몰두’만 하면 너무 지치잖아요. 뭔가 발산하고 풀어낼 곳이 필요한데 연주가 그런 점에서 정말 좋아요. 일단 소리를‘표출’하기 때문에 답답함이 뚫리고, 혼자 연주에 몰두하다 보면 이런저런 생각들이 정리되거든요. 타인에게 기대는 힐링은 한계가 있는데 누구의 구애도 받지 않고, 혼자 자유롭게 의지대로 조절하며 치유할 수 있으니 참 좋은 것 같아요. 그래서 전 누구든 평생을 살며 즐길 수 있는 악기가 하나쯤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게 또 다른 나를 찾는 한 가지 수단이 될 수 있으니까요.” 나이를 실감하는 순간조차,‘요즘 유행하는 노래를 모를 때’‘동창들이 트로트를 부르기 시작했을 때’로 설명할 만큼 삶의 중심에 ‘음악’을 세워둔 그에게 이루고 싶은 꿈을 물었다.

“매번 같은 연기를 한 적 없는 다니엘 데이 루이스 같은 배우가 되고 싶다, 가수 최백호 씨처럼 늘 낭만을 잃지 않는 중년이 되고 싶다는 생각은 해봤지만, 꼭 실현해야 할 목표, 꿈 같은 걸 정해놓은 적은 없는 것 같아요. 당장 내일 어떤 일이 생길지도 모르는데, 내 의지대로 흘러갈 리 없는 미래를 예상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그보단 욕심내지 않고, 지금 내 자리에서 그때그때 오는 현실에 최선을 다해 대응하는 게 좋겠죠. 그러면 행복을 느낄 확률도 높거든요. 순간순간을 열심히 살면 그 정도의 보상은 늘 주어지는 것 같더라고요.”

 


 

“타인에게 기대는 힐링은 한계가 있는데 연주는 누구의 구애도 받지 않고, 혼자 자유롭게 의지대로 조절하며 치유할 수 있으니 참 좋은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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