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후의 삶, '부부 버킷리스트'가 있나요

기사 요약글

외로움에 대비하기 위해, '부부 버킷리스트'

기사 내용

은퇴는 누구나 겪는 인생의 과정이지만,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준비할지는 개인마다 다릅니다. 철저한 대비와 계획을 세워놓은 경우도 있지만, 막막한 심정으로 떠밀리듯 은퇴를 맞는 경우도 있죠. 이에<헤이데이>는 한국샌더스은퇴학교 조관일 교장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로 했습니다. 그 역시 은퇴에 얽힌 복잡다단한 감정을 겪은 뒤 현재 은퇴자를 위한 교육에 뜻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부부 동반 모임이 있었다. 모두 현직을 떠나 2막 인생에 들어선 사람들이다. 1차로 음식점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2차는 멤버 중 한 사람의 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일단 집 구경을 했다. 집 구경 중에 눈길을 끈 것은 거실 한쪽에 잘 자리 잡은 전자오르간과 기타. 악기를 연주하냐고 물으니 퇴직 후에 시작한 취미란다. 구청에서 운영하는 문화 교실에서 배우기 시작했는데 점점 마음이 끌려 전문가의 도움을 받고 있다고 했다.

그때부터 화제는 악기로 옮겨졌다. 색소폰에 심취한 이도 있고, 기타에 흠뻑 빠진 사람도 있다. 이미 악단을 조직해 발표회까지 한 멤버도 있었다. 악기에 대한 이야기로 흥이 나자 집주인은 탬버린과 하모니카 등 몇 가지 악기를 더 내놓았고 죽이 맞은 사람들끼리 작은 음악회가 벌어졌다. 솜씨는 서툴고 불협화음이 심했지만 모두 즐거운 얼굴이었다. 그러고 보니 나만 악기에 대해 전혀 문외한인 것 같았다. 조금 쑥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어떻게 악기 다룰 생각들을 하셨어요?”

나의 질문에 멤버들이 거의 같은 대답을 했다. 버킷리스트 때문이란다. 퇴직 후에 이제 뭘 할까 궁리하다 떠오른 것이 버킷리스트였고, 그것을 만들다가 악기 다루기를 선택했다는 것이다. 영화<버킷리스트(The Bucket List)>의 영향은 대단한 것 같다. 그 영화가 우리나라에서 상영되기 이전에는 일반인들 사이에서 ‘버킷리스트’를 운운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죽음을 앞둔 자동차 정비사 카터와 돈 많은 사업가 에드워드가 우연히 같은 병실에서 만나 죽기 전에 해야 할 일을 리스트로 만들고 함께 여행을 떠나는 의미심장한 장면을 본 이후 많은 이들이 버킷리스트를 만들기 시작했다. 심지어 젊은이들까지도.

나는 잠시 충격을 받았다. 어떤 악기도 다룰 줄 모르는 데다가 버킷리스트도 아직 작성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은퇴학교니 뭐니 하며 노후 문제를 연구하고 강의를 하지만 정작 나는 현역이라는 이유로 버킷리스트를 만들지 않았던 것이다. 내게는 약간 잘못된 생각이 있어서 버킷리스트라면 말 그대로 ‘죽기 전에 해야 할 일들’이고, ‘죽음’과 연관되어야 한다는 선입견이 있다. 그래서 해마다 그 해에 이루고자 하는 목표만 정해놓았지 버킷리스트는 만들지 않았던 것이다(물론 잘못된 생각이다. 버킷리스트란 꼭 은퇴 후, 죽음을 전제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화제는 악기에서 다시 버킷리스트로 옮겨 갔다. 그리고 저마다 리스트에 올린 목표들을 설명했다. 조용히 들어보니 모두들 노후설계를 그럴듯하게 잘하고 있었다. 저마다의 타고난 소질을 계발하여(이건‘국민교육헌장’에 나온 표현이다) 자기 나름대로의 세상을 만들며 멋진 삶을 꾸려가고 있었다. 남편들이 버킷리스트에 대해 열변을 토하고 있는데 한 아내가 불쑥 질문을 던졌다.

“버킷리스트 중에 아내와 함께하는 리스트는 없는 거예요?”

결정타였다. 순간 남편들이 조용해졌다. 누군가 “당연히 아내와 함께하는 거지요”라고 얼버무렸지만 그건 임기응변이었다. 분명히 남편들이 말한 버킷리스트는 자기 위주였다. 그중에는‘세계 일주하기’처럼 아내와 함께하는 것이 전제된 것도 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남편들의 변명에 다른 아내가 쐐기를 박는다.

“아내와 함께한다면서, 왜 버킷리스트를 만들 때 아내와 상의를 안 해요?”
“나는 남편한테 그런 리스트가 있는 줄도 몰랐네요.”
 

그렇다. 아내들의 지적은 의미심장하다. 그때 갑자기<백년을 살아보니>의 저자인 99세 철학자 김형석 교수님이 떠올랐다. 그분이 말씀하셨다. 노후에는 배우자 중 한 사람이 먼저 세상을 떠나기 때문에 외로움에 대비해야 한다고. 실제로 부부 중 누군가는 먼저 떠난다. 그러기에 외로움에 대비하는 것 이상으로 함께 추억을 만드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노후에는 인생의 목표도 함께 정하고 함께 가는 것이 맞는 것 같다. 그것이 죽기 전에 함께해야 할 ‘부부 버킷리스트’일 것이다.
 

조관일
조관일 창의경영연구소 대표이자 한국샌더스은퇴학교 교장으로, 퇴직 및 은퇴자를 위한 교육을 개발하고 있다. 농협중앙회 상무, 강원도 정무부지사, 대한석탄공사 사장 등을 역임하며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자기 계발, 서비스, 커리어, 노후 등 다양한 분야의 강의를 하고 있다.

※ 이 컨텐츠는‘시니어 문화 활성화’를 위해 라이나전성기재단이 발행한<헤이데이> 기사 중 일부를 발췌한 것입니다. 라이나생명은 라이나전성기재단의 다양한 사회공헌 사업을 지원합니다.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