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음의 정서, 일본인 집단 거주 지역이었던 후암동 산책

기사 요약글

HUAM-DONG 잘 정비되지 않은 공간이 주는 매력이 있는 후암동.

기사 내용

낡음의 정서, 후암동 산책
이호영의 골목 산책 마지막 코스는 과거 일본인 집단 거주 지역이었던 후암동이다.
낡음과 이국적인 매력이 공존하는 이곳을 걸으며 사색에 빠져본다.

오랜 역사가 숨 쉬는 곳

‘두텁바위로’와 ‘소월로’라는 사랑스런 지명으로 더욱 친근해진 후암동은 그리 알려지지 않은 곳이다. 하지만 대중교통의 허브인 서울역과 가깝고, 지척에 있는 아름다운 남산 덕분에 최근에서야 사람들의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관심은 변화로도 이어지고 있다. 해방촌으로 이어지는 골목에 젊은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지고, 남산의 자연과 시간의 향기를 공유하려는 이들의 관심도 늘어나면서 의미 있는 상권이 형성되고 있는 것. 남산 자락 언덕에 서향으로 걸쳐진 동네이기에 평지에 비해 불편하고 확장성에서 한계가 있어서인지 연남동과 서촌처럼 급격한 변화는 없지만 용산 미8군이 평택으로 이전하면서 개방될 용산민족공원에 대한 기대감에 부동산 가격이 심상치 않다.

남산도서관 맞은편 두텁바위 아래로 서울에서 찾아보기 힘든 못생긴 골목과 합벽과 지붕이 붙어버린 적산가옥들이 눈에 띈다.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인 집단 거주 지역이었던 역사가 드문드문 남아 특색 있는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 덕분에 골목의 가치를 찾는 사람에게는 흥미로운 산책 코스로 주목받는다.

골목마다 펼쳐진 계단과 오르막이 숨을 가쁘게 만든다. 군데군데 부서지고 바스락거리는 계단은 잘 정비된 아스팔트와는 다른 재미를 준다. 언덕으로 나뉘는 아랫마을과 윗마을은 비슷한 듯 다른 점을 찾게 한다. 윗마을은 용산도서관을 비롯해 독일문화원 등 굵직한 역사 공간이 자리하고 아랫마을은 정감 있는 후암시장을 비롯해 적산가옥 길을 따라 재미있는 산책 코스가 펼쳐진다. 그곳에 자리한 ‘눅서울’은 후암동 변화의 신호탄이라 감히 말해본다. 후미진 골목 안에 숨겨져 후암동의 미래가치를 가늠하게 하는 눅서울에서 이곳의 미래를 그려본다.

NOOK SEOUL 온고지신의 지혜로 적산가옥을 재탄생시킨 눅서울.

미래유산 가치, 눅서울

유학 생활 시절부터 골목의 정서를 좋아했다. 2014년 교수 생활을 마치고 다시 서울로 올라왔을 때도 서울 곳곳의 골목을 기웃거리는 것이 가장 먼저 한 일이고 큰 즐거움이었다. 이화동, 창신동, 서촌, 연남동, 성수동 등의 골목 산책은 힐링은 물론 스스로의 가치를 되돌아보게 하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그러면서 골목에서 일어나는 변화도 감지할 수 있었다. 시정 방향이 무분별한 개발보다는 도시재생으로 정해지면서 보물 같은 동네의 원형이 지켜지고, 창의력을 가진 젊은 세대가 개성 넘치는 새로운 상권을 만들면서 의미 있는 변화를 주도하는 모습이 인상 깊게 다가왔다. 그즈음 후암동을 산책하다가 후암사거리 근처에서 9.3평 대지 위에 망루처럼 솟은 허름한 3층집을 만나게 됐다. 나의 사랑방인 눅서울이다. 눅서울은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80년의 역사를 가진 적산가옥이었다. 인근에 드문드문 자리하고 있는 다른 적산가옥과 어울리며 독특한 아우라를 내뿜고 있었다. 신축과 개축의 경계에서 온고지신의 지혜로 보존과 복원을 택했고, 1년여의 시간을 들여 2015년 8월 완성했다. 후암동의 정서와 잘 어울리는 눅서울의 ‘눅(NOOK)’은 ‘아늑하고 조용한 곳’  또는 ‘후미진 골목’이라는 뜻이다.

눅서울은 나만의 사랑방이 아닌 공유의 공간으로서 역할도 한다. 에어비앤비(Airbnb)를 통해 외국인에게 숙박 공간을 제공하고 또 그들과 함께 어울리면서 민간 외교관으로서 역할도 마다하지 않는다. 혼자 소유하지 않고 다양한 타인과 공유함으로써 마치 샘물 같은 마르지 않는 잔잔한 수익 구조와 함께 키우고 가꾸는 기쁨을 주는 반려견과 같은 녀석이다. 게다가 미래유산의 가치를 인정받아 여러 매체에 소개되었고, 2015년 11월에 ‘서울시 아름다운 건축물’상과 2016년 10월에는 ‘서울시 건축상’을 연거푸 수상하며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나는 후암동이 북촌이나 연남동처럼 갑자기 요란해지고 시끄러워지는 동네가 되는 것을 결코 바라지 않는다. 자산가치의 척도인 집(house)이 아니라 행복한 삶의 공간(home)으로서의 가치로 어수룩한 후암동을 지키고 싶을 뿐이다.

 

14개월의 산책을 마치며

‘이호영의 골목산책’은 14개월 동안 서울의 특별하고 다양한 모습의 골목들을 찾아 나섰다. 그리고 어느새 연재를 마무리하는 열네 번째의 산책을 마쳤다. 칼럼을 기고하면서 만난 서울의 다양한 골목들은 세계 어느 곳의 골목들과 견주어도 결코 시시하지가 않다. 빼어난 자태의 산과 아름다운 한강으로 이루어진 서울은 600년이 넘는 도읍지로서의 역사와 수많은 사람의 열정적인 에너지로 남다른 향기와 활력이 넘친다. 도시재생과 함께 살아나고 변화하는 서울의 골목들은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꿈틀거리며 매일 진화하며 때로는 서로 연결되고 다시 분화되는 역동적인 체질 개선이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골목의 변화와 흥미로움을 공유하는 산책을 통해 부지런히 어울리면 향후 건강하고 특색 있는 삶을 살아가는 데 원동력이 될 것이 분명하다. 출발지와 도착지에만 집중하는 ‘점의 이동’적 삶의 방식에서 걷고 또 걷는 과정에서 지나온 경로를 기억하는 ‘선의 이동’적 삶의 방식은 다양한 스펙트럼을 경험하게 하고 다름과 틀림을 정확하게 구별하게 한다. 욕심과 자본이 겨루는 대로변이 아니라 이웃의 정과 배려를 훈훈하게 느끼고 공감하는 골목 산책이 계속 이어져야 하는 이유다.


이호영
후암동 오래된 적산가옥을 재해석한 눅서울의 대표로 1982년 뉴욕 유학 시절, 다양한 문화 충격을 체험한 뒤 남과 다른 관점으로 세상을 해석하는 능력을 키웠다. 현재는 서울을 비롯해 여러 나라의 도심 속 유의미한 변화가 일어나는 곳을 찾아다니며 그만의 시각으로 변화를 해석하고 있다.
그 속에는 트렌드를 읽는 방법과 삶의 질을 높이는 방법이 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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