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세화가 공부하는 방식

기사 요약글

그는 강연 때마다 사람들에게 공부를 역설한다.

기사 내용

최근에는 <홍세화의 공부>라는 책까지 냈다. 그에게 왜 공부해야 하는지 물었다.

그의 인터뷰집 <홍세화의 공부>에서 대담자 천정환 작가는 홍세화를 ‘공부주의자’라고 설명한다. 공부로써 우리 삶과 이 세상을 낫게 만들 수 있다고 진짜 믿는 사람이고, 다른 사람과 함께 공부하려는 사람이기 때문이란다. 이렇듯, 홍세화에게 공부는 일상이다. 그를 만난 곳도 서울 홍익대 근처에 있는 독서토론 모임 ‘소박한 자유인’의 학습공간이다. 그가 공부하는 장소다. 홍세화는 여럿이 함께 공부하는 이 모임의 발기인으로, 그가 이사장을 맡았던 학습 공동체 협동조합 ‘가장자리’를 대체한 모임이다. 이곳은 별다른 인테리어 없이 책상과 의자, 책이 공간을 채우고 있는 그야말로 조용히 공부하기 좋은 소박한 공간이다. 그는 “회원들이 자유롭게 책을 읽고 세미나를 열고 공부하는 곳”이라고 설명했다. 그러곤 명함 한 장을 건넸다. ‘장발장은행 은행장 홍세화’. 그는 “문 닫는 것이 목표인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은행장”이라고 소개했다. 장발장은행은 벌금형을 받고도 돈이 없어 교도소에 갇히는 21세기 장발장들에게 돈을 빌려주는 곳이다. 죄질이 나빠서가 아니라 가난 때문에 자유를 포기해야 하는 사람들이 한 해에 4만 명이 넘는다는 사실에 그가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과 세운 은행이다. 시민 성금으로 운영되는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은행이지만 사회적 모성을 품은,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은행인 셈이다.

이 명함에서 공부로써 세상을 더 낫게 만들 수 있다고 믿는 사람, 홍세화가 읽혔다.

 

‘소박한 자유인’은 무슨 의미인가요?

결국은 자아실현의 의미인데, 너무 욕심을 내지 말자는 의미예요. 생존을 위한 것도, 사회에 기여하는 것도 거창하게 하지 말고 작은 몫이라도 하면 된다, 이런 의미지요.
 

모여서 어떻게 공부를 하나요?

현재 회원은 250명이며, 책 선정위원회에서 매월 책 한 권을 선정해 회원들에게 추천하고, 석 달에 한 번씩 선정한 책을 보내줍니다. 또 세미나를 열고, 관심사가 비슷한 회원끼리 작은 모임을 갖고요. 가입도 자유롭고 참여도 자율적이지요.
 

공부 모임을 이끄는데, 선생에게 공부란 무엇인가요?

제게 공부는 두 가지 의미입니다. 먼저 공부는 ‘나를 짓는 과정’이에요. ‘짓다’라는 동사에는 독특한 함의가 있어요. 농사를 짓고, 옷을 짓고, 집을 짓습니다. 인간의 생존 조건인 의식주가 모두‘짓다’의 목적어가 됩니다. 한편으로는 내 존재를 짓는 문제지요. 나를 어떤 인간으로 지을까? 공부란 결국 나를 잘 짓기 위한 끊임없는 과정이고 모색이지요. 사람은 죽는 순간까지 완성된 존재가 될 수 없다고 할 때 나를 조금이라도 잘 짓기 위한 공부는 살아 있는 사람의 당연한 과제가 아닐까요?
또 하나는 이 사회에서 내가 잘못된 선택을 할 때 나뿐 아니라 남에게도 피해를 주는데, 그런 면에서 공부는 옳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돕지요.
 

공부에 부담을 느끼는 분들도 많아요. 그런 분들에게 어떻게 조언하나요?

인문학, 사회과학 이렇게 공부에 ‘학’ 자를 붙여서 그런지 마치 공부를 학자들이 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저는 공부에 ‘학’ 자 붙는 것이 마땅치 않아요. 인문학은 사람 공부이고, 사회과학은 세상 공부지요. 그렇다면 내가 사람이니, 사람 공부는 당연히 해야 하지요. 또 내가 세상의 일부이니 세상 공부를 해야 하는 것 아니겠어요? 그러니 ○○학보다 ○○ 공부라는 표현이 좋지요. 그런 면에서 공부는 모든 사람이 다 해야 하는 것, 해서 마땅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사람들이 많이 찾는 인문학은 어떻게 공부해야 할까요?

인문학 즉 사람 공부는 삶을 공부하는 것이고 어떻게 삶을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공부이니, 내 삶을 되돌아보는 의미라면 대단히 좋지요. 그런데 현실은 모순이에요. 인문학 열풍이라고 하는데, 대학에서는 인문학의 진수라고 할 수 있는 철학과, 사학과 등이 없어지거나 통폐합되는 쪽으로 가고 있거든요. 이 모순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그래서 저는 우리 사회의 인문학 열풍에는 거품이 있다고 생각해요.

자기 삶을 성찰하고 대면하면서 삶의 방식을 바꾸는 데 용기를 주는 것이 인문학 본연의 목표라고 봐요. 그런데 과연 인문학을 공부하는 분들이 지금껏 살아왔던 자기 삶의 궤도를 수정할 수 있을까? 거기까지는 미치지 못하고 있어요. 장식물이나 또 하나의 소유 대상이 된 거지요. 에리히 프롬이 말한‘소유냐 존재냐’에서 존재를 따지는 것이 인문학인데, 존재의 문제를 따지는 것조차 소유가 된 거지요.
 

소유가 아닌 존재로 가려면 내 삶을 바꿀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이군요.

그것이 핵심이지요. 그것이 공부를 하는 목적이고요.

자기 변화, 성숙을 위한 자극제, 충격파 이것이 인문학을 접하는 가장 중요한 목표라고 생각하는데, 아직 우리 상황은 소유 개념이 강해요. 인문학을 통해 나를 성찰하고 성찰을 통해 나를 변화시켜, 성숙해지는 삶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나를 변화시키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요?

내 몸을 내 의지로 다른 환경에 가져다 놔야지요. 이를테면 다니던 괜찮은 직장을 그만두는 것이라든지. 그것도 하나의 용기지요. 그러려면 끊임없이 회의해야 해요. “이렇게 생각하는데 이게 맞나?” 하고 확인하고요. 책을 읽고 사유하면서 끊임없이 확인하고 잘못됐으면 수정하고요.
 

혼자 공부하는 것보다 여럿이 같이 공부하는 것이 도움이 되겠네요.

아무래도 혼자 하는 것보다 여럿이 같이 책을 읽고 토론하며 생각을 공유하는 것이 더 좋지요.
 

공부 주제는 어떻게 정하나요?

지금 이 시기에 하는 고민이지요. 누구나 자기 고민의 지점이 있을 겁니다. 그 지점을 알기 위해선 자기를 먼저 들여다보아야 해요. 자기 일상을 들여다보고 거기서 어떤 점에서 내가 변화를 모색해야 할까? 이런 질문을 스스로 던져야 해요. 그러면 내가 이런 쪽 공부를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나오지 않을까요? 결국엔 스스로 발견해야 해요. 그러지 않는다면 그만큼 절박함이 없는 거지요. 절박함이 없으면 결국 분위기에 휩쓸리게 됩니다.
 

공부는 자기 성찰에서 시작된다는 말씀이군요.

‘한국 사람들은 과연 어디서 자존감을 느낄까?’라는 생각을 종종 합니다. 왜 자존감이 높지 않을까? 자기 삶에 자존감을 느끼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고 봐요. 자기 삶을 대면하면서 나름대로 당당함을 갖고 있는 부모는 자식 교육에 크게 걱정하지 않아요. 내가 당당하기에, 내 자식이 나처럼 살면 되거든요. 하지만 한국의 40~50대 대부분은 자기 자식을 걱정해요. 이는 부모가 자기 삶에 별로 당당하지 않다는 말이기도 하지요. 물질적 조건이 아니라 자기 삶에 당당하면 불안해하지 않아도 돼요. 자기 삶에서 당당함이 빠져 있는 것이 첫 번째라고 보고요, 다른 하나는 관계성의 부박(浮薄)함이라고 봐요. 관계가 결핍돼 있어요. 심지어 부부 사이에서도 생각의 공유가 이뤄지지 않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한국의 부부는 생각이 다른 문제에 부딪칠 때 그냥 덮고 가요. 이야기해봐야 팽팽하게 맞서고 말다툼한 경험만 있을 뿐 합의를 이룬 적이 없거든요. 그러니 50대가 되면 부부관계가 겉돌아요. 속내를 이야기할 것이 없는 거지요. 물질적으로 풍요로울지 몰라도 정신적으로는 지극히 외로운 존재지요. 우리는 누구를 설득하지 않아요. 왜? 설득되지 않으니까. 설득한다고 설득된 경험이 없으니까. ‘아, 너는 그런 생각을 갖고 있구나’라고 규정하고 끝이에요. 관계의 풍요로움과 돈독함은 생각을 공유할 때 가능해요. 같이 만나면 그냥 좋은 사람이 있어요. 왜 그럴까요? 굳이 생각의 공유가 깊지 않더라도 생각이 열려 있어서 그래요. 자기 삶에 당당하지 못하고 관계성이 부박한 사람들이 찾는 것은 결국 물질적 풍요, 즉 소유한 것을 자랑하는 것밖에 없어요.

“인문학을 통해 나를 성찰하고 성찰을 통해 나를 변화시켜, 성숙해지는 삶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관계성을 높이려면 어떤 공부가 도움이 될까요?

왜 부부 사이에 합의를 이루지 못할까? 애정으로 맺어졌고 권력관계는 있겠지만, 계급적 처지도 동일하고요(웃음). 그런 관계라면 생각을 일치시키지는 못해도 최소한 접근시킬 수는 있잖아요. 그런데 어떤 함정에 빠져 있어서 그럴까? 그 이유를 가르쳐주는 것도 인문학입니다.‘생각하다’와‘생각’에는 엄중한 차이가 있어요. ‘생각하다’는 회의(懷疑)하다는 뜻입니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말의 의미지요. 그런데 ‘생각’은 어떨까요? 스피노자는 ‘생각의 성질은 고집이다’라고 했어요. 풀이하면 생각의 함정에 빠지지 말라는 의미예요. ‘저 사람은 고집이 센 사람이야’ 하는데 내 생각을 고집해야지 해서 고집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생각의 성질이 고집이기에 자연스럽게 고집하는 겁니다. 이렇게 ‘생각하다’와 ‘생각’의 의미는 거의 반대예요. ‘왜 한국의 부부들이 합의를 이루지 못할까?’에 대한 답이 나왔어요. 생각하다의 과정이 없기 때문입니다. 교육 문제와 연결되는데, 우리는 어려서부터 주입식 암기 교육을 받아서 생각만 갖고 있는 겁니다. 글을 쓰려면 이렇게도 저렇게도 생각하고 이게 맞나 틀리나 끊임없이 확인해요. 글쓰기에는 이런 과정이 일상화돼 있어 생각의 함정에 빠지지 않아요. 우리는 이런 생각하다의 과정 없이 생각만을 주입받아온 것이지요. 이걸 깨닫고 생각하다의 과정을 밟는 것이 인문학 공부지요.
 

선생은 자기 성찰을, 회의를 어떻게 하나요?

‘내 존재가 어제보다 오늘 성숙하고, 오늘보다 내일 성숙할 수 있느냐? 내가 맺고 있는 관계가 더 성숙해질 수 있느냐?’이지요. 성숙해지기 위해서 아주 작은 것이라도 노력해요. 그렇게 생각하면 내 삶에 변화를 가져오지요.

또 적절한 삶의 긴장을 유지하게 되고요. 성적 경쟁, 성공 경쟁, 부의 경쟁 등 우리는 어려서부터 끊임없이 남과 경쟁했어요. 중년이 됐으면 이제 물질을 놓고 남과 비교하는 경쟁이 아니라 성숙 경쟁, 성숙 비교를 해야 합니다.
 

공부하는 중년들에게 한 가지 조언한다면?

귀를 열고 잘 들어야 해요.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에 다른 사람의 견해를 경청하고 끊임없이 자기 생각을 수정하고 다른 사람의 자리에서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의 판단력에 자신감을 갖게 된다는 내용이 있어요. 고루해져서는 안 돼요. 정체돼서 변하지 않는다는 말이지요. 시대는 바뀌었는데, 과거의 어느 시점에 자기 자신을 유지시키는 겁니다. 그런 사람을 흔히 ‘꼰대’라고 하지요. 꼰대가 되지 않기 위해서도 공부가 필요합니다. 공부를 안 하니까 정체되는 겁니다. 힘은 없어지는데 생각은 고루하고 시대의 변화는 따라가지 못하고, 그런 사람일수록 더 말이 많아져요. 했던 이야기를 또 하고요. 저도 옛날이야기를 안 하려고 노력하는데, 나이가 들수록 과거 이야기는 하지 않는 것이 좋아요.
 

공부를 통해 어떤 어른이 되고 싶으세요?

따뜻하고, 까칠하지 않고, 고루하지도 않고, 꼰대스럽지 않은 인자한 어른이지요. 그리고 중요한 것이 익을수록 고개를 숙일 줄 아는, 겸손을 갖추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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