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리단의 뒷골목에는

기사 요약글

이태원과 남산 사이의 움푹 파인 구릉 지역을 경리단길이라고 부른다.

기사 내용

10여 년 전부터 개성 있고 재능 있는 젊은 장사꾼과 디자이너들이 작은 점포들 사이로 스며들면서 남다른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는데, 요즘에는 그 뒷골목에서 일어나는 변화가 심상치 않다.

2000년에 6호선 녹사평역이 개통되면서 이태원 거리에 한정되던 이국적인 상권은 호젓한 남산 드라이브길 자락 밑, 경리단길까지 실핏줄처럼 퍼져나갔다. 평지도 아니고 심한 경사지로 이루어진 이곳은 아마도 서울에서 단위 면적당 점포가 가장 많이 들어선 골목일 것이다. 턱없이 오르는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하고 떠나는 젠트리피케이션의 아픔을 수없이 겪으면서도 각자의 경쟁력과 생존의 가치를 꾸준히 만들어간 덕분에 주말이면 끊임없이 몰려드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붐빈다. 현재 사회적 문제로 거론되는 젠트리피케이션은 종국에는 자영업자들과 지역의 상권을 함께 몰락시킨다. 경리단길 역시 그런 우려가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그런데 경리단길은 다른 지역의 젠트리피케이션과는 조금 양상이 다르다. 경리단길은 구릉 지역의 독특한 생김새 때문에 대기업의 무차별적 진입이 용이하지 않아 대기업 자본과 자영업의 생존경쟁이 벌어지지 않는다. 이 때문에 개성 있는 가게들이 끊임없이 진화를 위한 진통을 겪는 중이다.

경리단길은 뒷골목까지 촘촘하게 상권이 확장되는 등 다양한 자영업자들의 성공과 실패가 공존하는 정글이 점점 커지고 있다.

 

진화하는 뒷골목

제법 가파른 언덕길임에도 골목에서 차이를 인정받은 카페, 개성 넘치는 작은 가게들은 주인들의 높은 안목 덕분에 ‘덕후’ 수준의 고객들을 꾸준히 불러들인다. 누구나 뛰어들 수 있는 접근성이 좋은 대로변의 평범한 상권이 아닌, 가파르고 후미진 골목의 분위기는 한적하고 편한 느낌이라 사색하는 사람들이 모여 천천히 주어진 시간과 공간을 음미한다. 소월로40길에 위치한 프랭크타운은 오래된 기다란 2층 연립주택을 과감하게 통창으로 변화를 주어 카페, 공방 등 다양한 상품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복합건물로 모습을 바꿨다. 숨을 헐떡이며 언덕을 올라야만 만날 수 있어 소위 말하는 ‘대박 상권’은 아니지만 다른 가치를 찾는 사람들에게 가장 ‘핫’한 곳으로 이름을 높이고 있다. 프랭크타운은 맛집으로 검색되어 누구나 찾기 편한 곳이 아닌, 그 존재만으로 향후 이 지역의 또 다른 진화를 예고하는 일종의 시그널로 봐도 될 듯하다.

길을 따라 걷다 보니 담벼락을 바다색처럼 파란색으로 칠한 허름하고 작은 주택이 눈에 들어온다. 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멋진 설치작품처럼 느껴져서 도시와 거리가 마치 커다란 갤러리 같다는 착각이 든다. 시간과 삶의 애환이 더해진 허름한 주택을 작품처럼 대하니 그 모습이 특별하고 귀하다는 생각과 함께 걱정도 든다.

복잡한 대로변과 달리 한적한 느낌의 뒷골목에는 다름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보존보다는 개발에 익숙한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오랜 시간 향기가 밴 켜를 단숨에 헐어버리고 옆집과 비슷한 건물로 변신시켜 버리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사회에서 어찌할 수 없는 현상이지만 수익 구조만을 고려해 개성 없는 원룸 건물로만 채워지는 서울의 골목들이 매우 안타깝다. 다시 대성교회를 끼고 오르막을 오르면 창의어린이공원이 보인다. 경리단길의 새로운 명소로서 인근 주민과 외국인 가족이 자녀들과 즐겨 찾는 곳이다. 삼삼오오 모여 앉은 동네 할머니들이 오래전에 이곳이 공동묘지였다는 과거를 말씀해주신다. 2층 높이의 커다란 곰돌이 모습의 놀이공간이 생뚱맞기는 하지만 가파른 언덕길을 매일 오르내리는 주민들에게는 시골 마을의 정자 같은 장소다.

가을바람이 살갗에 닿는 어느 날, 저녁 식사 뒤 경리단길 골목 산책은 불 켜진 조그마한 가게들의 아기자기한 내부 모습을 볼 수 있는 소박한 즐거움으로 가득 찬다. 쓸데없는 바쁨과 채워진 욕심을 내려놓고 사색하며 걷는 문화에 익숙해지면 골목은 미래의 보석 같은 가치를 품은 대상으로 다가온다.

언덕을 끼고 있는 경리단길은 내려다보고 올려다보는 재미가 있다.

 

산책의 가치

작은 불빛들이 아름다운 밤의 경리단길을 보며 향후 10년 뒤 이 지역의 미래를 예측해본다. 남산의 허리 밑 동네인 이곳은 현재 번잡하고 어지러운 모습이지만 차츰 정리되고 개선되면 서울에서 흔치 않은 주거와 상업이 어우러진 곳으로 변화되리라 예상한다. 대로변에서는 교감할 수 없는 분위기와 차이가 점점 의미 있는 대상으로 부각되면서 현재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지역으로 성숙되어갈 것이다. 개인적으로도 아파트 생활을 청산하고 이곳에서 서울의 아름다운 전망을 바라보며 언제라도 편안한 옷차림으로 동네 마실을 나가 개성 있고 흥미로운 이웃과 가게들을 기웃거리고 싶다. 나는 평지가 아닌 언덕을 끼고 있는 서울 이곳저곳의 골목들을 사랑하는데 오르게 되면 꼭 내려가야 하는 것이 우리네 인생사와 닮았기 때문이다.

주중의 한적함과 주말의 번잡함을 다양한 골목에서 느끼고 많은 사람이 부대끼고 함께 살아가는 모습에서 교감하는 사람 냄새가 정겹게 다가온다. 열심히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상인들과 서민들의 밝은 표정에서, 존중할 만한 그들만의 삶에 대한 태도가 있다고 느끼기에 겸손해지고 언행이 조심스러워진다. 주변의 누군가를 친절하게 대하고 공손하게 인사하는 기회를 만날 수 있는 골목은 어느덧 나이를 제법 먹은 나에게 귀한 깨달음을 선사하는 멋진 친구가 되었다. 발품을 팔아 얻은 귀한 경험은 세상의 어떤 것보다 소중하다는 생각으로 늘 지혜롭게 공감하려고 한다. 골목을 걸으면서 그저 구경에 머물지 않고 발상을 달리하며 다름을 위한 재해석을 하다 보면, 운 좋게 골목 안에 숨은 보물을 찾아내어 나와 주변 지인에게 선물 보따리를 안겨주기도 한다. 나의 사랑방이자 민간 외교관 역할을 하는 눅서울과 N2도 그렇게 골목 산책을 하며 우연히 만난 녀석들이다.

 

이호영
후암동 오래된 적산 가옥을 재해석한 눅서울의 대표로 1982년 뉴욕 유학 시절, 다양한 문화 충격을 체험한 뒤 남과 다른 관점으로 세상을 해석하는 능력을 키웠다. 현재는 서울을 비롯해 여러 나라의 도심 속 유의미한 변화가 일어나는 곳을 찾아다니며 그만의 시각으로 변화를 해석하고 있다. 그 속에는 트렌드를 읽는 방법과 삶의 질을 높이는 방법이 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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