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 둘레길을 따라

기사 요약글

‘어느 나라가 수도 한가운데에 남산과 같은 보물이 있을까’

기사 내용

생각해보니 비교 대상이 전혀 없다. 가깝다는 이유로,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바라보기만 하던 남산 산책은 도심 한복판에서 들을 수 없는 소리를 머금고 있어 더욱 소중하다.

사실 남산은 한국을 찾은, 혹은 한국에 살고 있는 외국인들에게 더 인기 있다. 한국 여행 가이드 책자 대다수가 가볼 만한 곳 1순위로 꼽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들에게는 산책이 삶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해외 어느 나라를 가도 도심 한복판에 우뚝 선 산이 없고 그 아래 잘 정비된 산책 코스를 찾아보기 힘들다. 우리에게는 그런 남산이 익숙하지만 외국인들은 그 광경을 신비롭고 아름답다고 느낀다. 나이가 들수록 가깝고 익숙한 것들을 경시하고 소중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때가 많아진다. 남산 둘레길 산책은 익숙함 속에서 새로움을 발견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준다. 운 좋게도 남산 둘레길 산책을 하며 폭포수처럼 떨어지는 비와 타오르는 태양을 모두 만났다. 안개에 휩싸인 남산 속을 걸으며 햇빛에 반짝이는 잎사귀와 노랫말 같았던 개울 소리를 감상하며 걷는 시간, 이 얼마나 소중한가.

힐튼 호텔에서 남산 둘레길 코스로 접어든다. 신호등을 건너자마자 밝고 아름다운 성벽이 나타나고 우측으로 난 언덕길이 조금은 가파르게 시작된다. 방금 전 폭우로 여름의 푸르름을 진하게 머금은 소나무와 억새풀의 색과 향이 싱그러워서 자연스럽게 호흡이 상쾌해진다. 마음껏 자란 억새풀은 계절의 풍요로움을 솔직하게 보여주고 넉넉함마저 전해주니 마음이 부자가 된 기분이다. 오늘 소개하는 산책길은 백범광장, 안중근의사기념관, 목멱산방 그리고 얼마 전에 개장한 통감 관저터로 이어지는 2시간 정도의 짧은 산책길이다.

역사 속을 걷다

새롭게 단장한 백범광장은 남산 자락 서쪽 끝에 있다. 일제강점기 때 도로를 내며 갈라졌던 부분을 지하터널로 만들면서 그 위에 도로를 덮어 다시 남산과 이어졌다. 광장의 넓은 잔디 마당은 바라만 보아도 시원하고 좋은데 천천히 걸으면서 도심의 복잡함을 내려놓으니 머리가 금세 맑고 개운해진다. 우리의 아픈 근현대사의 상징처럼 보이는 백범 김구, 이시영 선생의 동상을 대하면서 친일 청산과 적폐 청산이라는 시대적 사명을 다시 한번 되새겨본다. 故 육영수 여사의 지시로 지어졌던 어린이회관 건물은 현재 서울시 교육청에서 부속 건물로 사용하고 있다. 가능하다면 다시 이곳을 어린이들에게 되돌려줘 이 자연을 만끽하게 했으면 한다. 부속 건물 앞에는 커다란 십여 개의 바윗덩어리들이 솟은 듯이 서 있다. 비를 머금고 선 그 돌에는 애국과 국가 안위에 대한 귀한 글들이 새겨져 있어서 잠시 숙연해진다.

이 의미 있는 바윗덩어리들과 자연스럽게 연결된 안중근의사기념관은 여느 기념관과는 달리 열두 개의 박스로 구성된 단정한 모습이어서 건축가(임영환, 김선현)의 의도를 궁금하게 한다. 내용을 모르고 찾는다면 침략자의 심장을 저격한 영웅을 위한 장소가 맞는지 당황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다. 야스쿠니신사처럼 종교화하지 않고 민족의 정기와 기개를 보여준 역사적 사건에 대해 사색할 수 있는 의도를 담고 있다. 건축가는 이 기념관을 방문하는 관람자에게 가급적이면 일방적 생각을 강요하지 않고 관람자가 스스로 생각하고 상상하는 공간이 될 수 있도록 배려했다. 따라서 기념관의 형태는 적나라한 실체를 보여주는 것을 최대한 배제하고 추상적이고 개념적 느낌을 강하게 전달할 수 있는 기념비 형태로 디자인되었다. 낮에는 간결한 침묵의 기념비가 조국을 되찾겠다는 정신을 단호하지만 검박하게 표현하고, 밤에는 반투명 박스를 통해 흘러나오는 불빛에 의해 과거의 어느 한 순간이 몽환적으로 재현된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안중근의사기념관이 서 있는 터는 야스쿠니신사에 묻힌 일본의 영웅들이 조선신궁을 만들어 천황 참배를 강요했던 장소다. 지금은 나라를 되찾기 위해 침략자의 심장을 겨누었던 안중근과 단지동맹 12위의 혼이 우뚝 서 있어 산책의 진중함을 더한다.

 

산책의 가치

안중근의사기념관을 둘러보고 나오니 해는 중천에 있고 배가 고파진다. 계단을 내려와 나무들이 마치 터널처럼 우거진 둘레길 초입에 들어선다. 나무숲에 둘러싸여 있다 보니 이곳이 도심 한가운데라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초입에서 조금 들어와 우측으로 꺾어지니 산속에 파묻힌 듯이 자리 잡은‘목멱산방’이 보인다. 경주 불국사의 계단과 닮은 잘생긴 한옥 식당이다. 최근 미쉘린 가이드로부터 수준 있는 음식점으로 평가받은 비빔밥 전문집이다. 천장이 높은 한옥의 멋을 함께 느끼며 깔끔한 한국의 맛을 경험할 수 있는 이곳은 서울을 찾는 외국인들에게 꼭 추천하고 싶은 곳이다. 후식으로 맛을 본 팥빙수의 팥은 전라북도 장수군 산서면에서 가져오는데 오묘하면서 깊은 맛이 일품이다. 시원한 팥빙수로 더위를 쫓고 기운을 내서 다시 산책에 나선다.

남산의 형태를 온전히 느낄 수 있는 3~4부 능선에 만들어진 아름다운 길은 숲이 우거진 채로 굽이굽이 굽어져 있어서 천천히 음미하고 걷는 맛이 최고다. 걷다가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마천루의 도시가 뚜렷하게 보이고 정면과 우측으로 고개를 향하면 깊은 산중을 노닐며 신선놀음을 하는 듯한 착각을 선사한다. 땀도 식힐 겸 길옆에 마련된 넓은 데크 위 휴게 공간에서 잠시 쉰다. 가끔씩 불어주는 시원한 산바람이 기분 좋게 목에 걸리면 마치 횡재라도 한 것 같다. 데크 위로 비스듬히 솟은 소나무들의 모습에서 옛 선비의 멋들어진 시 한 구절을 소중하게 전해 들은 듯하다. 생각보다 한적한 둘레길에서는 산책하는 노부부와 데이트하는 젊은 연인들의 다정한 모습을 보게 된다. 시내 여러 곳에서 접근성이 좋은 이곳이 이렇게 조용한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얼마나 바쁘고 마음의 여유가 부족한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하다. 맑은 물을 귀로 만나고 초록 잎을 코로 느끼며 햇빛의 근사함을 피부로 느낄 수 있는 남산 둘레길은 단순히 데이트 코스나 운동을 목적으로 이용되기에는 너무나 아쉽다. 걸으며 사색하고 자아의 가치와 존재감을 찾기에 이만한 곳이 없다.

남산 둘레길에서 벗어나 시내 방향으로 내려오면서 만난 곳은 최근에 개방된, 경술국치의 현장 통감 관저터와 서울유스호스텔이다. ‘기억의 터’라는 이름으로 조성된 공간은 일본군 위안부를 기리는 공원이다. 위안부 할머니 247명의 이름과 증언을 시기별로 새긴 ‘대지의 눈’과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된다’라는 글귀가 새겨진 작품 <세상의 배꼽>이 설치되어 있다. 또한 과거 서슬 퍼런 공안정국 시절 안기부 건물로 사용되었던 서울유스호스텔은 새롭게 단장해 세계의 젊은이들을 맞이하고 있는데 수많은 민주 인사가 고초를 겪었던 지하실을 떠올리면 마음이 착잡해진다. 남산의 아름다운 자연을 접하고 민족의 아픈 역사까지 되짚어보는 산책을 마치고 명동으로 들어선다. 쏟아지듯 넘치던 유커(중국 단체 관광객)들이 갑자기 사라진 이곳에서‘한국’과‘한국인’이라는 존재에 대해 정체성과 가치관을 고민하고 확립해야 할 시기라는 커다란 깨달음을 만난다.

백범광장은 숭례문에서 이어지는 남산 초입에 자리를 잡고 있어서 서울역, 회현동, 후암동 등 주변 지역으로부터 접근성이 좋다. 특히 바로 앞에 위치한 밀레니엄 서울힐튼 호텔의 투숙객들이 근사한 남산 전망과 함께 가벼운 산책 코스로 활용하면서 지리적 이점을 극대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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