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윤유선의 이유 있는 도전

기사 요약글

어떤 결정을 해야 할 때 ‘그래서 행복할까’라는 질문을 던지면 답이 나와요.

기사 내용

여섯 살에 데뷔해 공백기 없이 43년을 달려온 윤유선. 남들보다 일찍 인생길이 정해진 덕분에 삶이 순탄했으나 그 때문에 또래들이 경험했을 법한 도전과 좌절을 지나쳐 살아온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현명한 그녀는 후회와 체념으로 과거를 일괄하는 대신 짜릿한 경험을 찾아 도전하는 쪽을 택했다.

 

<그와 그녀의 목요일>이란 작품으로 11년 만에 다시 연극무대에 섰다는 얘길 들었어요.
네, 연극무대에 꼭 한번 다시 올라보고 싶었어요. 드라마나 연극이나 연기를 한다는 건 같지만 발성이나 감정 표현 등 방식이 전혀 다르거든요. 그런 것들을 제대로 연습해보고 싶었는데 마침 좋은 대본이 들어와 다른 작품은 다 미뤄두고 연습에 몰두했어요. ‘내가 정말 살아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 만큼 즐거웠지만, 그 과정에서 ‘발성이나 제스처가 왜 이러지? 내가 이렇게 부족한 연기자였나?’ 하는 자괴감에 빠진 적도 있죠. 괜히 한다고 나서서 내 밑바닥을 드러내는 건 아닌가 싶었지만 뚜껑을 열고 보니 정말 잘했다 싶어요.

어떤 점에서요?
제가 맡은 연옥은 은퇴한 국제분쟁 전문기자로 위암 선고까지 받은 인물이에요. 그녀 앞에 과거 함께 아이를 낳았지만, 그렇다고 남편은 아닌 역사학자 정민이 나타나 매주 목요일마다 토론을 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남녀 혹은 부모 자식 간의 사랑, 인생의 가치 등에 대한 문제가 다뤄지죠. 누구나 공감할 만한, ‘잘 쓰인 이야기’를 연기하는 점도 좋았지만, ‘자애롭고 착한 어머니’처럼 제가 늘 맡아온 캐릭터가 아니라 더 마음에 들었어요. 연옥은 일, 명예, 자아에 대한 애정이 되게 강한 여자거든요(웃음).

<복면가왕>에 깜짝 출연해 노래 실력을 뽐내기도 했죠. 그러고 보면 ‘도전’ 자체를 즐기는 것 같아요.
잘하지 않아도 내가 좋아하는 일이라면 시도해볼 수 있잖아요. 일부러라도 그런 계기를 자꾸 만들어야 조금이나마 발전이 있는 것 같아요. ‘나는 이 정도 나이를 먹었으니까, 혹은 이 정도 경험이 쌓였으니까 이제 됐어, 충분해’ 하기에는 인생이 너무 길어요.

자기계발에 대한 욕구가 확실히 있네요.
뭐랄까, ‘못 가본 길’에 대한 아쉬움? 그 비슷한 감정도 있는 것 같아요. 제가 여섯 살에 데뷔해 지금까지 연기자 생활을 하다 보니 평범한 또래들이 할 법한 경험들을 많이 놓치고 살았어요. 일찍부터 정해진 길을 걸었기 때문에 그만큼 안정적이긴 했지만, 도전에 대한 목마름 같은 게 늘 따라다녔어요. 그걸 깨닫게 된 게 삼십 대 초반이었는데 곧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리는 바람에 또 안정적인 길을 걸었죠(웃음). 그런 아쉬움을 늘 안고 살다 보니 이제는 기회가 닿는 족족 뭔가 도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43년간 특별한 공백기 없이 연기를 계속할 수 있는 비결이 뭐예요?
전력 질주하지 않았어요(웃음). 분명 열심히 하지 않은 시절이 있었죠. 만일 연기에 대해 늘 강박이 있었다면 애초에 지쳐 나가떨어졌을 거예요. 뛸 때도 있었지만, 천천히 걷거나 앉아서 쉴 때도 많았기 때문에 경로를 이탈하지 않은 것 같아요. 사람이 계속 뛸 순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에 저는 우리 애들한테도 공부나 장래에 대한 스트레스를 별로 안 줘요.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자녀들과의 일상을 공개해 화제가 됐어요. 시험을 못 본 아들에게 ‘너 속상했겠다’는 위로부터 건네는 따뜻한 엄마더군요.
우리 애들은 또래 친구들에 비해 템포가 느려요. 조급해하는 법이 없죠. 제 교육 방식이 그랬고요. 전 스트레스 받아가며 학원에 다니는 것보다 성적이 좀 떨어지더라도 방학 생활을 만끽하라는 스타일이에요. 기본 인성만 잘 갖춰놓으면 언제고 아이들이 자기 길을 찾아간다는 주의거든요. 공부나 진로 문제보단 어떻게 하면 우리 아이들이 부모로부터 사랑 받는다고 느낄지에 관심이 더 많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아무리 바빠도 꼭 식구들끼리 아침을 먹으려 노력했고, 가급적 저녁에는 스케줄을 비워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들을 맞이하려고 신경 썼죠.

엄마가 된 뒤 달라진 가장 큰 변화는 뭐였어요?
사람이 많이 유해졌죠(웃음). 엄마, 아내가 되고 보니 이해심이나 참을성이 많이 길러지더라고요. 남 같으면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평생 안 보고 살 수도 있지만 가족은 그럴 수 없잖아요. 제가 보기보다 성격이 급해서 촬영이 길어지면 되게 답답해했거든요. 배우란 작품이 들어올 때를 기다리고, 또 내 촬영 순서가 돌아오길 기다려야 하는 사람인데 그땐 마냥 불만이었던 거죠. 그런데 아이를 기르다 보면 얼마나 인내하고 참아야 하는 순간들이 많아요(웃음). 결혼 생활을 하면서도 많이 다듬어졌고요. 남편이나 나나 이상한 사람들이 아닌데 서로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이렇게 싸울 수 있나 싶더라고요. 이십 대에는 내가 무조건 옳고, 나랑 생각이 다르면 그르다고 치부해버렸는데 서로 의견을 조율하는 과정에서 내 생각이 틀리기도 하다는 걸 납득하게 됐어요.

유순하고 상냥하기만 할 것 같은데 까칠한 면이 있다니 의외네요.
지인들이 저더러 ‘윤다르크’라는 별명을 다 지어줬을 정도예요. 제가 ‘예스 걸’은 또 아니거든요. 아니다 싶으면 지적하고, 특히 전체적인 질서를 흔드는 사람을 못 견뎌요.

결혼을 서른세 살에 했으니 늦게 한 편이에요. 남편과는 어떻게 만났어요?
존경할 만한 남자이되, 엄한 아버지와는 반대로 재미있고 편한 사람이면 좋겠다는 식의 구체적인 조건을 달아 기도를 올렸어요(웃음). 그러다 친구 소개로 남편을 만났는데 제가 기도에 언급했던 사람과 가까운 남자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거기다 제 까다로운 면을 맞춰줄 수 있는 사람은 자기뿐이라는 호언장담을 하기에 믿어볼까 싶었죠. 그러다 정말 만난 지 100일 만에 부부가 됐어요.

살아보니 정말 재미있고 편한 사람이던가요?
네, 참 좋은 사람이에요. 제가 눈가 주름을 걱정할 때마다 “괜찮아. 내가 요즘 눈이 나빠져서 네 주름이 안 보여”라든가 “전지현 역할이 아니라 전지현 엄마 역할을 할 텐데 무슨 걱정이야” 하는 식으로 너무 무겁거나 진지하지 않게 저를 위로해주거든요. 저는 그렇게 유머러스하면서도 따뜻한 남편의 심성이 참 좋아요. 다만 그걸 확인하기까지 7년간 무지 싸웠죠(웃음). 왜 너무 가까운 사람에겐 기대감이 큰 법이잖아요. 조금만 섭섭하게 해도 ‘어떻게 네가 그럴 수 있어’ 하는 거죠. 초반엔 요령이 없어 그런 감정을 직설적으로 막 드러냈는데, 살다 보니 본질적으로 따져야 하는 중요한 문제와 이해하고 덮어줘야 할 사소한 문제들이 구분되더라고요. 지적은 줄이되 고마운 점은 가급적 크게 구체적으로 표현하려고 애쓰다 보니 서로에게 참 좋은 사람이 됐어요. 저희 남편이 우스갯소리로 ‘결혼 생활도 10년에 한 번씩 재계약을 해야 한다’고 하는데 여차하면 결혼을 엎어버리겠다는 얘기가 아니라 다시 계약하고 싶을 만큼 적극적으로 노력하며 살자는 뜻이죠.

 

 

여배우로서 ‘나이 듦’에 대한 부담감은 없나요?
여자로서는 있고, 배우로서는 없어요(웃음). 내년이면 제 나이가 쉰인데 요즘 들어 시력이 떨어지고 흰머리가 나는 데다 똑같이 먹어도 살이 찌더라고요. 자연스러운 노화의 과정이겠지만 솔직히 서글픈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에요. 그러나 배우라는 입장을 생각하면 또 나쁘진 않아요. 제가 10년 뒤부터는 염색을 안 하겠다고 했는데, 흰머리, 주름진 얼굴만큼 배우의 내공을 드러내는 요소가 또 어디 있겠나 싶어서예요. 괜히 연기에 깊이가 묻어나고 세월의 내공 같은 게 담기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다가올 노년을 기꺼이 받아들이려고요.

인생의 전성기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나요?
제가 늘 후배들에게 하는 말이 있어요. 잘됐다고 잘된 것도 아니고 안됐다고 안된 것도 아니라는 얘기요. 상황은 언제든 바뀔 수 있기 때문에 언제 내가 잘나가고 못 나가고는 중요하지 않아요. 내가 생각하는 전성기와 남들이 보는 전성기가 같지 않을 수도 있고요. 그보단 내가 지금 행복한지가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어떤 결정을 해야 할 때 ‘그래서 행복할까’라는 질문을 던지면 금방 답이 나오는걸요.

언제 가장 행복해요?
사랑하는 내 가족들과 공감하고 소통하고 있다고 느끼는 순간이 가장 행복해요. 요즘 같으면 중학생 딸아이가 벌써 내 마음을 이해하고 위로할 때 ‘정말 행복하다, 살맛 난다’는 생각이 들죠. 제 삶의 중심은 결국 가족이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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