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길에 서린 휘게 라이프

기사 요약글

소소한 일상에서 찾는 작은 행복, 휘게 라이프.

기사 내용

정동길을 따라 천천히 걷다 보면 자연스레 ‘휘게로운’ 삶을 공감할 수 있다. 고즈넉한 돌다길과 갤러리, 작은 공연들까지 삶의 여유는 도처에 서려 있다.

덴마크어이자 노르웨이어인 휘게(Hygge)는 소박하고 여유로운 시간 그리고 일상 속 소소한 즐거움이나 안락한 환경에서 오는 작은 행복을 뜻한다. 2016년 영국의 콜린스 영어사전이 선정한 올해의 단어에서 ‘브렉시트(Brexit)’에 이어 2위를 차지했을 만큼 세계적인 공감을 얻고 있다. 우리나라 5060세대에게 일상은 어떤 의미일까. 지난 반세기 동안 경제발전과 산업사회의 구조에서 존재감보다는 성취욕으로 살아온 그들은 은퇴 후에도 길들여진 삶의 방식 탓에 주어진 시간도 여유롭지 못하고 쫓기는 일상을 보내는 이들이 많다. 이들에게 필요한 건 자아의 가치이고 그것을 찾는 가장 좋은 방법은 골목 산책이다. 골목 산책을 하는 동안은 일과 경쟁에서 벗어나 걸으면서 자신과 대화하며 자연스레 자아를 더듬어보고 찾아내는‘휘게’의 가치를 공감하게 된다. ‘숨’ ‘쉼’ ‘삶’이라는 세 단어가 ‘건강과 여유 그리고 의미’라는 뜻을 대신하는 귀한 단어이고, 이는 곧 북유럽의 삶의 방식인 ‘휘게’와도 일맥상통한다. 요즘 서점에 자리 잡은 ‘비우는 삶’에 대한 다양한 담론을 담은 책들 또한 채움으로 급급했던 지난 삶을 반성하면서 불필요한 물질과 욕심을 덜어 내고 내려놓으려는 사람들의 관점과 태도를 반영한다.

여유를 찾아주는 정동길

본격적인 정동길 산책을 시작하기 전 시청의 안팎과 주변을 감상한다. 눈이 시릴 정도로 햇살이 좋은 계절을 만끽하기 위해 신발을 벗고 맨발로 시청 앞 푸른 잔디를 밟으며 그 촉감을 느껴본다. 사소한 일이지만 이 또한 일상에서 누리는 ‘휘게스런’ 감동의 시간이다. 잔디밭에 앉아 정면으로 바라보는 시청은 역사적 가치를 품은 옛 건물과 새롭게 지어진 우스꽝스러운 유리 덩어리 건물이 서로 어울리지 않은 듯 어우러져 반전의 흥미를 선사한다. 채광이 좋은 신청사에 들어서면 시원한 로비를 만날 수 있다. 오픈된 천장에는 베니스 비엔날레 수상 작가인 전수천의 <메타서사-서벌>이라 명명된 대형 설치작품과 7층 높이의 벽면에 조성된 ‘수직 정원(Green Wall)’이 시청을 찾는 시민들에게 친근함으로 다가온다.

정동은 서울의 다른 동네와는 달리 공간의 품격을 확연히 느끼게 하는 특별함이 있다. 먼저 성공회성당은 도로변 건물이 철거되면서 존재감과 가치가 드러나 많은 사람의 관심을 받고 있다. 주변의 붉은 벽돌 건물과의 조화를 여유 있게 감상하다 보면 이 지역이 마치 세련된 유럽의 도시가 아닐까 하는 기분을 느끼게 한다. 성공회성당의 본관과 이어진 사제들의 사택으로 쓰이는 한옥동의 어울림은 다른 곳에서 쉬이 보기 어려운 조화라 서울 시민이라면 한 번쯤은 보고 공감하면 좋을 듯싶다. 덕수궁 정문을 보며 왼쪽 골목으로 접어들면 본격적인 특별한 느낌의 정동길 산책으로 이어진다. 점심시간이면 인근 회사의 직장인들이 여유를 즐기기 위해 삼삼오오 모여 돌담길을 가득 채우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돌담길에 들어서서 왼편 언덕길을 오르면 만나는 서울시립미술관에서는 현재 까르띠에 소장품 전시가 한창이다. 8월 15일까지 열리는 이 전시는 까르티에 현대미술재단의 소장품 100여 점을 만날 수 있는데, 첫 순회 도시로 서울을 정했다는 데 의미를 가진다. 단순히 작품을 전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작가들이 직접 전시장을 디자인하고 전시장 벽면에 공간과 어울리는 그림을 그렸다. 이는 새롭게 공간을 재창조하여 관람객이 특별한 순간과 감동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한 의도이다. 무료로 개방하고 있으니 정동 산책길에 나선 스스로에게 멋진 안목을 선물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정동의 품과 격

정동제일교회를 중심으로 덕수궁, 서울시립미술관, 배재학당, 주한 러시아대사관, 이화학원(이화여고 100주년 기념박물관), 예원학교, 중명전, 정동극장 등이 울타리를 치듯이 모여 있다. 그 가운데에 위치한 정동제일교회는 우리나라 최초의 감리교 교회로서 선교사 아펜젤러에 의해 1887년에 완공됐다. 건축학적으로도 의미가 있으며 겸손한 형태의 고딕양식으로 지어져 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매우 세련되고 아름답다. 이후 추가된 부속 건물(1980년 최우수작품상, 한국건축가협회) 역시 첫 건물과의 조화를 위해 노력한 건축가의 해석력을 엿볼 수 있다. 이 교회에서는 역사적으로 수많은 토론회와 음악회, 성극 등이 열렸다. 이는 민주주의 훈련과 신문화 수용, 민족의식 고취에 크게 공헌해 1976년에는 당시 문화공보부가 19세기 건축물인 붉은 예배당을 사적 제256호로 지정해 영구적으로 보존하게 했다. 정동극장 옆 골목 안에 있는 중명전은 구한말의 비극적인 역사의 아픔과 기록 등을 보존하고 있는 곳으로 고종 황제에 의해 러시아 건축가가 설계하고, 서양 신고전주의 건축양식으로 지어졌다. 조선의 국운이 기운 곳이자 주권을 되찾기 위한 노력이 끊이지 않았던 중명전은 치열한 우리 근현대사의 살아 있는 현장이다.

이 밖에 돌담길을 따라 이어지는 국악 버스킹과 3년째 진행한 ‘정동야행’ 프로그램 등 다양한 거리공연과 전시는 산책에서 얻는 덤이다. 비움으로써 단순해지고 여유를 찾는 ‘휘게’ 콘셉트로 정동길 골목 산책을 나서보자. 우리 모두가 바라는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고 가꾸어나가려면 한 발씩 물러서는 여유와 배려가 꼭 필요하다. 5060의 입장은 잠시 내려놓고 우리 사회의 희망이고 건강한 삶의 원천인 2030의 미래에 대해 고민하고 격려하자. ‘헬조선’과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이라는 어처구니없는 구호가 사라지고 그들이 상상력과 창의력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다. 무엇이든 즐기고 행하면 좋은 결과를 얻게 되는 세상에서 다양한 해석력으로 만나는 정동길 골목 산책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전시 중인 까르티에 현대미술재단의 작품처럼 서울의 무수한 골목 중에서도 우월한 품격이 있다. 좋은 계절 호젓한 산책은 욕심으로 과장된 물질적 명품을 휘감는 대신 존재감이 내재된 다름의 가치를 자신에게 선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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