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냄새 나는 배우 조성하

기사 요약글

어떤 한 시절의 환경이 자기 인생 전체의 행복과 불행을 판가름하지는 않잖아요.

기사 내용

 

흔히 ‘꽃중년’이란 말로 배우 조성하를 수식하곤 하지만, 근사한 외모보다 더 방점을 찍고 싶은 건 사실 그의 따뜻한 심성이다. 무명 시절, 택시 기사와 화분 장사 등으로 생계를 이어가며 얄궂은 인간 군상을 온몸으로 체득해온 그는 이해와 연민으로 사람과 세상을 바라볼 줄 아는 배우가 됐다. 그래서인지 한때 ‘살기가 돈다’는 얘기를 들었던 그의 큰 눈에는 이제 여유와 안정감이 가득하다. 막연한 계획보다는, 하루하루 충실한 삶으로 미래를 준비하고 싶다는 배우 조성하의 이야기

 

상대가 누구든 정말 빤히 쳐다보며 얘기하시네요? 그런데 그 눈길에 호기심과 애정이 묻어나는 것 같아요.
유심히 관찰하며 얘기하다 ‘이때다’ 싶으면 좀 웃겨보려고 그래요(웃음). 개인적으로 ‘하루에 열 번 남 웃기기’가 목표거든요. “조성하를 만나면 참 유쾌하고 편하고 즐겁더라.” 기왕이면 그런 얘기를 듣는 게 좋으니까.

개그 욕심이 있다고 해야 하나요?
그것보다 ‘지금 이 순간’의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예요. 누굴 만나면 언젠가는 헤어지게 마련이잖아요. 심지어 한 번의 만남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수도 있으니 순간순간 상대에게 좋은 인상을 주려는 노력이 필요하겠더라고요.

원래 그렇게 붙임성 좋은 성격인가요?
아니요. 젊었을 때는 경계심도 강하고, 승부욕도 세서 남들이 쉽게 다가오지 못했어요. 그때는 태생적으로 강한 사람처럼 비쳐지고 싶었죠. 제 눈이 유난히 큰 데다 흰자에 약간 노란빛까지 돌아서 ‘호랑이 눈이다’ ‘눈에서 광채가 난다’ 심지어 ‘눈에 살기가 있다’는 얘기까지 들었는데 지금은 나이도 들고, 두 딸의 아빠로 살다 보니 눈이 부드럽고 선해 보인다는 얘기를 들어요.

그 눈빛 때문에 일찍부터 배우 되라는 소리를 많이 들었을 것 같아요.
그렇진 않았어요. 배우의 길을 가게 된 건 좀 우연한 기회였는데, 고등학교 때 미팅 많이 시켜준다는 얘기에 혹해서 연극반에 들어갔거든요(웃음). 미팅은 고사하고 매일 ‘빠따’만 맞았지만, 그래도 전국 연극 대회에 나가서 제가 상을 탔단 말이죠. 그 일로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장학금을 받았는데 저희 집에서 그걸 얼마나 신통하게 생각했는지 몰라요. 우리 막내도 잘하는 게 있구나 싶으셨던 거죠. 제가 3남 1녀 중 막내인데 형, 누나들이 다 공부를 잘해서 매일 상장을 타 왔거든요. 그에 반해 저는 잘하는 게 하나도 없었으니 얼마나 주눅이 들었겠어요. 부모님이 좋아하시니까 ‘난 그럼 연기를 해서 성공해야겠다’ 싶어서 서울예대 연극과에 입학하게 된 거죠.

흔히 조성하를 ‘대기만성형’ 배우라고 해요. 30대 후반 늦은 나이에 주목받기 시작했는데 무명 시절이 그만큼 길었다는 얘기겠죠?
그런 셈이죠. 연극판에서 막내를 하다, 군대에 다녀와 1989년부터 배우로 돈벌이를 시작했는데, 1년 수입이 고작 20만원밖에 안 됐던 시절도 있었어요. 그 와중에 결혼은 했지 아기까지 낳았지. 어쩔 수 없이 택시, 택배, 화분 장사까지 안 해본 일이 없었죠. 처음부터 배우의 길을 좀 마땅찮아 했던 아버지는 지금이라도 경찰 시험을 보라고 성화셨고, 저도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수는 없다고 생각해서 서른세 살이 되던 해에 아내한테 연기를 그만두겠다는 선언을 했는데 오히려 아내가 단호하게 반대를 하더라고요. ‘나는 당신이 성공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지금까지 응원해왔는데 적성과 상관없이 생계를 위해 살겠다는 건 말이 안 되지 않느냐’ 이런 얘기였죠. 그때부터 어떻게 보면 ‘돈이 되는 연기’를 시작했던 것 같아요. 연극뿐 아니라 TV나 영화에서 연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다녔죠. 다행히 저를 잘 봐주신 감독님들이 계셨고, 운이 좋아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어요.

택시 운전에 택배 운송이라, 그 시절 고생을 많이 했네요.
남들은 고생이라고 얘기하는데, 저는 마냥 고생으로만 받아들이진 않았어요. 이게 다 연기 공부다 생각하면 그런대로 또 버틸 만했거든요. 어떤 한 시절의 환경이 자기 인생 전체의 행복과 불행을 판가름하지는 않잖아요. 어떤 상황에서건 내가 최선을 다하면 훗날 밑거름이 될 만한 영양분이 쌓인다는 사실도 그때 알게 됐어요. 왜 그런 말도 있죠. 많이 엎어져본 놈이 요령껏 잘 엎어지기도 하고 잘 일어나기도 한다고. 잘 때려서 살아남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프지 않게 잘 맞아서 생존하는 사람도 있거든요. 저는 그 시절 요령껏 잘 엎어지고 맞았던 모양이에요(웃음).

‘생업’에 종사하다 보면 별의별 사람들을 다 겪어봤겠어요.
그럼요. 시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시절 만났던 한 사장님이 있는데, 낮에는 그냥 작은 구멍가게 주인 같았던 분이 영업이 끝나면 카리스마 있게 시장 사람들을 조직하고 관리하곤 했어요. 시장이라는 작은 세계 속에서 알력 다툼, 파벌 싸움이 일어나는데 ‘아! 이런 건 직접 들어와보지 않으면 절대 모를 세상이겠구나’ 싶더라고요. 명동역에서 노숙자들한테 냉장고 박스를 500원씩 받고 대여해주는 아줌마가 있었던 건 혹시 아세요? 저는 500원이 없어서 추운 겨울 덜덜 떨며 밤을 지새웠는데, 박스를 덮고 자는 노숙자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어요(웃음). 평소 조용하다 술만 취하면 권총을 들고 설쳐대는 일명 ‘똥퍼 아저씨’는 또 얼마나 웃겼다고요. 이런 온갖 인간 군상을 직접 겪지 않았다면 아마 배역에 대한 이해도 많이 떨어졌을 것 같아요. 상상해서 연기하는 것과 경험해서 연기하는 건 접근 자체가 달라지거든요. 배우로서 돈 주고도 못할 값진 공부를 한 셈이죠.

살인마, 재벌 2세, 왕, 정치인 등 연기하다 보면 별의별 역을 다 맡잖아요. 그렇게 매번 새 인생을 사는 것도 참 재미있을 것 같아요.
심지어 여자로도 살아봤죠(웃음). 몇 년 전 뮤지컬 <프리실라>에서 버나뎃 역을 맡았을 땐데, 매일 제모를 하고, 코르셋에 하이힐까지 신은 채 두 시간 동안 춤추고 노래하느라 진짜 혼났어요. ‘나는 여자다’라고 끝없이 나를 마취시키며 끝냈던 공연이었죠. 힘들긴 했지만 그 과정에서 새삼 여성들의 관점을, 애환을, 위대함을 깨닫게 됐어요.

배우가 되길 참 잘했다 싶은 순간은 언제예요?
매 순간이 그래요. 배우는 사람을 관찰하고 이해하고 표현하는 직업이기 때문에 심심할 틈이 없거든요. 상대가 왜 저런 표정을 짓는지, 저런 말투는 어느 상황에 어울리는지, 지나가는 저 사람은 왜 표정이 심각한지, 어떤 속사정이 있는지 이런 것들을 상상하다 보면 하루가 금방 가죠. 심지어 혼자 있을 때조차 나를 들여다보고 고민하게 돼요. 그런 면에서 제가 좀 알려진 배우라는 게 아쉽기도 한데, 사람들이 뭐랄까 한 꺼풀 덧씌운 채 저를 대한다는 느낌이 들어서인 것 같아요. 서로 실례를 끼치지 않으려다 보니 인간 본연의 감정이 좀 덜 와닿는 기분이거든요. 그냥 ‘생활인’으로서 사람들과 뒤섞였을 때 느껴지던 ‘날것’의 희로애락이 그리울 때가 있어요.

방송 관계자들, 지인들이 얘기하는 조성하를 종합해보면 ‘같이 또 일하고 싶은 사람’으로 늘 수렴되더라고요. 산전수전을 다 겪은 사람들 특유의 인간미, 포용력 때문일까요?
저를 좋게 봐주신 분들이 많이 있는 건 맞지만, 일을 하자고 모였으니 사람만 좋다고 모든 게 다 해결되진 않더라고요. 그들이 원하는 능력, 그 이상의 것을 자꾸 만들어 내야 나를 쓸 때 자부심을 느끼고 남들에게 소개해줄 수도 있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어요.

영화<국제시장>과<명량> 출연 제안을 고사했다던데 대박 난 작품을 놓쳤다는 후회가 들면 어떻게 마음을 다잡으세요?
저는 모든 일에 다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때도 새 작품에 욕심을 냈다면 진행 중인 촬영 스케줄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다는 이유가 있었죠. 무리해서 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럼 어느 쪽도 최선을 다했다고 볼 순 없잖아요. 나는 그때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게 아니라 맡은 작품을 열심히 하고 있었으니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어요. 제일 바보가 남의 손에 든 떡을 부러워하는 사람이잖아요(웃음).

 

 

드라마 이후 잠깐의 휴식기를 갖고 있는데 쉴 땐 주로 뭘 하세요?
강아지 간식도 사러 다니고 아내와 딸들의 세탁물도 찾아가지고 오고 그러죠 뭐(웃음).

두 딸과 유난히 가까운 아빠라고 들었어요.
연기를 전공하는 큰딸은 이제 스물두 살, 둘째는 열다섯 살인데 어릴 적부터 워낙 살갑게 붙어 지내서 저랑 아주 친해요. 특히 나가고 들어올 때 서로 껴안고 인사해주는 습관은 우리 가족의 전통 같은거죠. 그럼 하루의 시작과 끝이 충만해지는 기분이거든요. 바쁜 와중에도 잠깐씩 눈을 보며 얘기하는 게 아주 중요하더라고요.

잔소리하는 아빠는 아닌가 봐요?
‘자고 난 침대 좀 정리해라’ 정도는 하는데 심각한 설교나 잔소리는 안 해요. 요즘 애들이 접하는 세상이 얼마나 합리적이겠어요. 그에 비하면 부모는 이미 올드하죠. 그런 차이를 존중해주려고 노력해요.

어느덧 50대에 접어들었어요. 지금 나이가 마음에 드세요?
그럼요. 젊을 때에 비해 모든 면이 더 낫죠. 젊을 땐 너무 몰라서 늘 이게 맞나? 자신이 없었어요. 그런 불확실함 때문에 늘 곤두섰었죠. 지금은 경험이 쌓여 모든 상황을 좀 편안하게 바라볼 수 있어요. 이게 여유겠죠? 그래서 대체로 행복해요.

누구나 앞날을 그려보게 마련인데 ‘조성하의 미래’는 어떻게 흘러갈 것 같으세요?
막연한 청사진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사람은 습관 안에서 모든 게 결정되기 때문에 그동안 살아온 습관을 유지하며 또 그때그때 옳다고 생각하는 판단을 하게 되겠죠. 그게 모여 제 삶이 될 테고요. 그저 마지막까지 사람 냄새 나는 배우로 남고 싶다는 욕심 정도는 있어요.

잘 살기 위해 다들 노력하잖아요. 끝으로 누군가 어떻게 사는 삶이 ‘잘 사는 삶’인지 묻는다면 뭐라고 답하시겠어요?
나를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잘 살아온 삶 아닐까요? 꼭 만나지 못해도 문득문득 그리워하는 대상이 되고 싶어요. 그게 제 가족이든, 친구든, 시청자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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