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게해海의 푸른빛에 물들다, 터키 이즈미르

기사 요약글

푸른빛으로 넘실대던 에게해의 파도가 긴 해안선을 따라 밀려와 숨을 고르고 잔잔한 물결이 되어 이즈미르에 닿는다.

기사 내용

먼 과거로부터 오랫동안 그 바다를 포근히 안아온 이즈미르에 그 푸른 물결이 차분하게 물들고 과거의 영광이 찬란하게 스며든다.

오랜 세월 바다에서 불어온 바람을 타고 온 에게해의 푸른빛은 이즈미르 구석구석으로 스며들었고, 걱정과 두려움은 먼 바다로 날려 보내며 이즈미르와 이즈미르 사람들을 보듬어왔다.

에게해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들 가운데 하나인 이즈미르를 여행하다보면 자연스럽게 이 땅에 남아 있는 수천 년의 흔적과 만나게 된다. 그와 동시에 이즈미르는 터키에서 가장 세련되고 도회적인 곳이기도 하다. 과거와 현재의 적절한 믹스, 구시가지와 신시가지의 묘한 공존 그리고 특유의 여유롭고 활기찬 분위기는 터키의 다른 도시에서는 느낄 수 없는 이즈미르만의 특별한 매력으로 남았다.

터키의 아버지, 아타튀르크 해변 거리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길 한편에 산을 깎아 사람의 얼굴을 형상화한 거대한 바위가 나타나 눈길이 멈췄다. 바위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운 위엄과 어딘지 존경심이 느껴지는 모습, 아타튀르크Ataturk와의 첫 만남이었다. 공항에서 숙소까지, 이즈미르의 도착은 어딘지 평온했다. 짐을 풀고 이즈미르 특유의 바닷바람을 마시러 나가본 해변에서 다시 재회한 아타튀르크. 그의 이름을 딴 아타튀르크 거리로 해안선을 따라 길게 이어진, 그에게 헌정된 길이다. 선선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해변 거리를 따라 걷다보니, 길의 왼편에 아타튀르크 박물관이 나타난다. 그의 얼굴이 새겨진 깃발들을 지나서 나타난 너른 광장엔 말에 올라 탄 아타튀르크의 동상이 바다를 응시하며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서 있다.

아타튀르크라는 인물의 원래 이름은 무스타파Mustafa였다. 그는 군사대학에서 탁월한 재능을 발휘하며 그를 가르쳤던 교수로부터 완벽함을 뜻하는 ‘케말Kemal’이라는 별명을 얻었고, 이를 이름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장교로 임관한 무스타파 케말은 이후 눈부신 전과를 거두며 장군이라는 뜻의 파샤Paşa라는 호칭을 이름에 추가해 무스타파 케말파샤가 됐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붕괴하자 그는 터키 민족독립전쟁을 일으켜 공화제를 선포하고 터키의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하게 된다. 무스타파 케말 파샤는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대명제 아래 터키의 근대화와 민주화를 위해 헌신했고, 훗날 그 공로를 인정받아 터키 국회로부터 ‘조국의 아버지’라는 뜻의 ‘아타튀르크’라는 고귀한 이름을 헌정 받기에 이른다. 그의 이름은 오늘날에도 터키 곳곳에 남아 국민들의 애정과 존경의 대상으로 기억되고 있다.

어느새 오렌지색으로 물든 이즈미르 하늘 아래, 붉고 푸른 에게해가 찰랑인다. 오늘날의 터키를 이룬 무스타파 케말 파샤와 아타튀르크. 완전히 다른 이름이지만 결국은 같은 사람. 마치 이즈미르와 스미르나이즈미르의 옛 이름가 다른 이름이지만 결국은 같은 장소인 것 처럼. 둘은 항상 같이 있었던 셈이다.

그의 얼굴이 새겨진 깃발들을 지나서 나타난 너른 광장엔 말에 올라 탄 아타튀르크의 동상이 바다를 응시하며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서 있다. 

INFO. 아타튀르크 박물관Ataturk Muzesi

1862년에 지어진 건물로 터키 독립전쟁 후 터키 군이 이즈미르를 탈환했을 때, 당시 총사령관이었던 무스타파 케말 파샤가 잠시 머물렀던 공간이다.

1927년 아타튀르크에게 기증되었으며, 1941년부터 박물관으로 사용되고있다. 이곳은 원래 그리스 국왕의 별장으로 사용되었던 곳으로 예전에 그리스 국왕이 이즈미르를 방문했을 때, 계단에 터키 국기를 놓고 그 위를 밟고 간 적이 있었다. 훗날 터키 군이 이즈미르를 탈환한 후, 그리스 국기를 계단에 놓고 아타튀르크에게 밟고 가도록 했으나 아타튀르크는 한 나라의 국기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짓밟혀서는 안 된다며 이를 거부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아타튀르크의 대인배 다운 면모를 이야기할 때 종종 인용되며, 교과서에도 실려 있다고 한다.

TIP. 홍합 돌마Midye Dolma

해변 거리는 물론이고, 거리를 걷다보면 쉽게 만날 수 있는 음식. 돌마란 ‘속을 채운다’라는 뜻의 터키어로 홍합 돌마는 홍합 속에 양념된 밥을 넣어 쪄낸 터키인들의 국민간식이다. 레몬즙을 살짝 곁들여 먹는 것이 일반적이다.

 

해변의 사원, 얄리 자미

아타튀르크 거리를 따라서 남쪽으로 걸어가다 보면 바다를 향해 탁 트인 모습이 시원스러운 코낙 광장이 나타난다. 1955년, 당시 수상이었던 아드난 멘데레스Adnan Menderes에 의해 기존에 자리하고 있던 해군막사가 철거되면서 오늘날과 같은 광장이 만들어졌고, 광장을 중심으로 빠르게 발전이 이루어져 이즈미르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벤치에 앉아 느긋한 시간을 보내는 이들과 분주하게 비둘기를 쫓아다니는 아이들의 모습이 평화롭기만 하다. 광장 한가운데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시계탑 뒤로 다소곳이 자리한 작고 어여쁜 모스크에서 시선이 멈춘다. 고전적인 오스만 건축 양식으로 지어진 해변의 모스크라는 뜻의 얄리 자미는 크기는 작지만 이즈미르에서 가장 우아한 모스크로 알려져 있다. 도자기로 유명한 퀴타히아Kutahya주의 파란색 터키석 타일 장식이 자칫 무난해 보일 수도 있었던 작은 모스크에 우아하고 신비로운 매력을 불어넣는다. 자홍색 벽돌과 파란색 타일 그리고 그 뒤로 보이는 빨간색 터키 깃발이 조화롭게 어우러지며 코낙 광장의 풍경에 풍성한 색감을 더한다.

INFO. 이즈미르 고고학 박물관Izmir Arkeoloji Muzesi

코낙 광장에서 멀지 않은 거리에 이즈미르 고고학 박물관이 있다. 그리 큰 크기는 아니지만 소장품은 주로 스미르나와 그 주변의 고대 유적지에서 출토된 유물들로 그리스-로마 시대의 동상과 석상 등 백여 점을 전시하고 있다. 특히 이즈미르 아고라의 제우스 제단에서 발굴된 포세이돈, 데메테르, 아르테미스 신의 동상이 유명하다.

 

이즈미르 거리 탐방, 키브리스 세히틀레르

키브리스 세히틀레르는 이즈미르의 젊은이들이 모여드는 이즈미르 최고의 번화가로 세계적인 패션 브랜드는 물론이고 터키쉬 딜라이트를 파는 가게까지 활기가 넘치는 거리이다. 하나로 이어진 길이지만 걸어가는 동안 거리의 분위기는 몇 번이나 달라질 정도로 다양한 매력을 품고 있다. 중심거리를 벗어나 골목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또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기차역으로 가는 골목에는 오래된 헌책방 거리가 나타나고, 해변으로 이어지는 골목의 클럽에서는 시끄러운 음악이 언제나 벽과 창문을 넘어 거리로 퍼진다. 잔잔한 라이브 음악이 흐르는 카페와 레스토랑이 모여 있는 골목도 있고, 어떤 골목에는 쓰러질 것 같은 오래된 그리스풍 가옥들이 운치 있게 남아 있기도 하다. 거리마다 등장하는 새로움이 걸음을 쉴 수 없게 만든다. 골목골목을 한참 쏘다니다 한산하지도 분주하지도 않은 어느 골목에 자리한 한 찻집의 야외 테이블에 자리를 잡는다. 때 묻은 하얀 앞치마를 두른 사내가 덤덤한 미소를 지으며 차이가 담긴 작고 투명한 유리컵을 테이블 위에 가만히 놓고 간다. 키 작은 의자에 앉아 쌉쌀한 차이를 홀짝이며 이즈미르의 공기를 음미한다. 골목에 퍼지는 차이 향, 약간의 매연 그리고 미세하게 코에 닿는 바다 냄새. 절반쯤 남은 차이에 설탕을 넣어 마지막 한 모금을 넘기고, 아직 가보지 못했던 골목들로 다시 걸음을 옮긴다.

INFO. 터키쉬 딜라이트Delight

터키어로는 로쿰이라고 불린다. 19세기 그 맛에 매료된 한 영국인이 이를 영국으로 수입하면서 ‘터키에서 온 기쁨’이라는 뜻의 ‘터키쉬 딜라이트’라고 이름 붙인 것으로 전해진다. 터키쉬 딜라이트의 주재료는 옥수수 전분과 설탕이며, 달콤하고 부드러운 맛이 특징이다. 레몬, 민트, 장미, 피스타치오, 호두, 아몬드 등 다양한 종류가 있다.

 

유대인 시장, 하브라 거리

하브라 거리는 시장 특유의 생기가 넘치는 곳이다. 싱싱한 생선들이 불빛 아래 반짝이고, 알이 굵고 먹음직스러운 과일과 채소들이 가득하다. 15세기에 스페인에서 넘어온 유대인들이 이곳에 터를 잡고 장사를 시작하면서 지금과 같은 시장 거리가 형성된 것이다. 유대인들이 모여들자 자연스럽게 그 주변으로 유대교회당이 하나둘 자리를 잡기 시작했고, 이 거리에 유대교회당을 뜻하는 터키어, 하브라Havra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이즈미르 사람들은 특유의 관대함으로 유대인들을 받아들였고, 유대교와 이슬람교는 오랜 세월 서로 공존해오며 하나의 이즈미르로 녹아들었다. 많은 유대인들이 이스라엘로 이주했지만 지금도 여전히 하브라 거리 주변으로 네 곳의 유대교회당이 문을 열고있다. 하얀 수염의 할아버지가 파는 뜨거운 살렙Salep 한 잔에 계피가루를 듬뿍 얹어 마시니 추위에 움츠러들었던 몸이 녹아내리고, 저렴한 시장 표 석류 주스 한 잔에 발걸음이 한결 가뿐해진다.

INFO. 케스타네파자르 모스크Kestanepazarı Mosque

케스타네파자르 모스크는 하브라 거리 근처에 있는 모스크로 1663년에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졌다. 성당 정면 입구와 본당 사이에 꾸며 놓은 좁고 긴 현관에서 계단을 타고 올라가면 유리벽으로 둘러싸인 네모난 기도 공간이 나타나는 것이 특별하다.

 

오래된 실크로드의 여관, 크즐라라아스 한

하브라 거리를 벗어나 18세기에 실크로드의 대상大商들이 물건을 맡기고 잠을 청했던 크즐라라아스 한으로 향한다. 사실 하브라 거리와 크즐라라아스한 모두 케메랄트라고 불리우는 큰 시장의 일부이다. 케메랄트는 약 2,5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시장 중 하나로 오랜 시간 이즈미르 경제의 중심지 역할을 해왔다. 오늘날 케메랄트에는 만 오천여 개의 가게가 운영되고 있으며 이곳에서 구할 수 있는 물건의 종류는 무려 80만여 가지에 이른다고 한다. 갖가지 먹을거리와 볼거리가 넘쳐나는 케메랄트에서 걸음의 속도는 자연히 느려진다. 사람들로 가득한 미로 같은 시장 골목을 발길 닿는 대로 걸으며 구경하다보니 어느 순간 크즐라라아스 한이 눈앞에 나타났다. 오스만제국의 건축 양식으로 지어진 건물은 오랜 기간 숙소로 사용되어오다가 1993년 보수를 거쳐, 지금은 2백여 개의 기념품 가게, 쥬얼리 숍등이 문을 연 시장으로 운영되고 있다. 깔끔하게 진열된 물건들은 3백 년이 넘는 세월을 견뎌온 건물 안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크즐라라아스 한의 옛 뜰은 야외카페로 운영되고 있다. 자그맣고 낮은 테이블에는 커피나 차이가 올라가 있고, 작은 의자 때문에 서로를 향해 몸을 기울인 채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의 풍경이 따뜻하게 다가온다.

 

신의 요새, 카디페칼레

이즈미르는 에게라는 바다와 동남쪽에 위치한 파고스Pagos산으로 둘러싸인 전형적인 요새도시이다. 시내에서 가장 높은 산꼭대기에 위치한 성곽에 오르면 이즈미르를 넘어 에게의 바다까지 사방으로 펼쳐진 시원스런 풍경이 두 눈에 빈틈없이 담긴다. 올라가기가 다소 힘들지만 숨을 골라가며 도착한 이곳 정상의 이름은 카디페칼레. 기원전 305년 신의 계시를 받아 지어진 요새로, 당시 파고스 산에 도착한 알렉산더대왕이 산 아래에서 낮잠에 빠졌는데 꿈에 나타난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가 이곳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라는 신탁을 내리자 그 신탁에 따라 알렉산더대왕의 후계자 리시마코스Lysimachos가 건설했다. 오랜 시간 이즈미르를 지켜온 이 불멸의 요새 카디페칼레는 많은 부분이 소실되었지만 대대적인 보수를 거쳐 지금은 이즈미르 전체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망대로 운영되고 있다. 높은데서 바라보는 이즈미르의 에게는 마치 시간이 멈추고 풍경이 정지되어버린 것처럼 고요하다. 주황색 지붕으로 촘촘한 이즈미르 땅이 잔잔한 에게해를 포근히 안고 있는 모습. 이즈미르 사람들의 여유로움은 바로 이곳에서 탄생했을 것이다.

 

도심 속 문화 숲, 퀼튀르파크

퀼튀르파크는 이즈미르 도심 한 가운데에 위치한 거대한 공원이다. 때문에 이즈미르에 있는 동안 한 번쯤은 지나치게 되는 곳. 아타튀르크 대통령의 명령에 의해 조성된 이 공원은 8천여 그루의 나무들이 빼곡하게 들어선 하나의 거대한 숲이며 전시장과 웨딩홀, 놀이공원과 동물원, 극장, 박물관 등 문화예술과 관련된 다양한 시설이 모여 있는, 이즈미르 시민들을 위한 복합 문화 공간이기도 하다. 야자수가 늘어선 길을 따라 공원으로 들어서면 느린 걸음으로 산책하는 이들이 드문드문 눈에 띄고 반가운 얼굴이 하나 나타난다. 또다시 만나는 아타튀르크의 동상. 누구나 편안하게 쉬어가는 공원인 점을 염두에 둔 것일까. 아타튀르크와 그의 오른팔이었던 이스멧Ismet이 난간에 기대어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편안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동상을 뒤로 하고 다시 공원의 숲길과 호수를 걷다가 나무들 위로 설레는 풍경과 마주한다. 천천히 돌아가는 동그란 대관람차.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향한다. 낮 시간의 한산한 놀이공원은 집 앞 놀이터처럼 편안한 느낌이다. 놀이공원 특유의 요란스러운 맛은 없지만 놀이기구를 타는 아이들의 모습은 만국 공통으로 맑고 밝다. 의외로 아직까지 낯설었던 이즈미르에게 마음을 놓는 장소.

INFO. 푸아르 이즈미르Fuar İzmir

터키의 3대 도시답게 이즈미르에서는 세계적인 박람회 및 주요 회의가 자주 개최된다. 푸아르 이즈미르는 2015년 터키 최대 규모로 건립된 최신 박람회장으로 이즈미르 국제관광박람회를 비롯하여 다양하고 큰 행사가 이곳에서 열리고 있다.

INFO. 이즈미르 역사예술 박물관İzmir Resim Heykel Muzesi

이즈미르 역사예술 박물관은 석조물 전시관과 세라믹 전시관 그리고 유물 전시관으로 이루어져 있는, 터키에서 가장 중요한 고고학 박물관 중 하나이다. 석조 전시관은 2층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즈미르 인근에서 출토된 고대, 헬레니즘, 로마시대 유물들로 컬렉션 되어 있다. 특히 이즈미르의 아고라에서 출토된 포세이돈과 아르테미스 석상이 유명하다. 세라믹 전시관 역시 2층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즈미르 주의 유적지에서 발견된 선사시대부터 비잔틴 시기까지의 아름다운 세라믹 유물들을 만날 수 있다. 유물 전시관에서는 오일램프, 작은 조각상, 유리공예 등이 전시되어 있다.

 

낭만골목, 다리오 모레노 거리

이즈미르에는 낭만적인 장소가 많지만 그 중에서도 한곳을 뽑으라면 역시 다리오 모레노 거리가 아닐까 싶다. 이 거리의 이름은 이즈미르의 유명한 가수의 이름에서 빌려왔다. 다리오 모레노는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학업을 병행하며 온갖 잡다한 일을 하며 성장했다. 어느 날 우연히 기타를 얻은 그는 독학으로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으며, 20대 초반에는 이즈미르에서 유명한 가수로 성장했다. 훗날 프랑스에서 가수로서 큰 성공을 거둔 그는 항상 사랑하는 고향을 잊지 않았다. 훗날 자신이 먼 곳에서 눈을 감으면 이즈미르에서 영원히 잠들게 해달라는 유언을 남겼으나, 아쉽게도 그의 시신은 어머니의 뜻에 의해 이스라엘에 묻혔다. 대신 다리오 모레노의 동상이 그가 살았던 거리를 묵묵히 지키고 서 있다. 유대인 지역에 위치한 다리오 모레노 거리는 작고 아기자기한 인상으로 밤에 찾으면 나지막한 정서가 녹아있어 훨씬 정취가 짙다. 기념품 가게와 분위기 좋은 카페와 바가 골목마다 자리하고 있고 거리의 끝에는 이즈미르의 명소인 오래된 엘리베이터 전망대 아산소르가 있어 밤풍경을 더한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니 해안을 따라 이즈미르 시내의 야경이 펼쳐진다. 시내의 불빛과 해안 도로를 달리는 차들이 점점이 반짝이며 이즈미르의 밤을 장식하고, 전망대에 있는 카페와 레스토랑에서는 서로를 바라보는 연인들의 미소가 야경처럼 빛난다.

 

또 하나의 이즈미르, 카르시야카

이즈미르는 약 40킬로미터에 달하는 긴 해안선을 가진 도시이다. 이즈미르 만을 계속해서 따라가면 바다 건너편에 있는 또 하나의 이즈미르, 카르시야카에 닿을 수 있다. 터키어로 카르시야카의 뜻은‘반대쪽 해안’. 버스나 전철을 타고 해안 도로를 따라 이동할 수도 있지만 역시 바다를 건너는 쪽을 선택한다. 페리 터미널 앞에서 1리라짜리 빵하나를 사고 2리라를 내고 페리에 오른다. 합쳐서 우리 돈으로 천 원 남짓한 짧은 항해의 시작. 일을 마치고 배에 올라 반대편의 집으로 돌아가는 누군가는 객실 안에 자리를 잡고, 바람이 차도 갑판으로 나온 이들은 여전히 배를 타는 일이 즐겁다.

배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는가 싶더니, 천천히 해안에서 멀어져 간다. 높지도, 그렇게 낮지도 않은 고만고만한 높이의 건물들이 해안을 따라 어깨를 맞대고 서 있는 모습에 잠시 쿠바 아바나의 해변이 스친다. 도시를 집어 삼킬 듯 무섭게 요동치던 아바나의 바다와는 달리 이즈미르의 바다는 더없이 침착하다. 어느새 등장한 갈매기들이 배와 나란히 날갯짓을 하며 바다를 가로지른다. 허공에 던져지는 빵조각을 신속하게 채가는 갈매기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표정이 천진난만하다. 마지막 빵 한 조각을 허공에 던지고 나니, 어느새 카르시야카가 눈앞이다. 이슬람 국가이면서도 서구화된 세속주의를 지향하는 터키에서 이즈미르는 가장 개방적인 도시로 통한다. 그리고 그런 이즈미르 안에서도 가장 세련된 지역으로 손꼽히는 것이 바로 카르시야카다.

반대편 이즈미르에 아타튀르크 거리가 있다면 카르시야카에는 아타튀르크 대통령의 또 다른 이름인 케말 파샤Kemal Paşa거리가 있는데, 이 거리의 초입에 서 있는 히잡을 벗어던진 두 여인의 동상이 이곳의 분위기를 짐작케 한다. 앞에서, 뒤에서 걸어오는 사람들과 보조를 맞추며 천천히 거리를 걸어 나간다. 활기찬 거리에는 세련된 카페, 레스토랑, 뷰티숍 등이 빼곡히 이어져있다. 이즈미르에 도착하기 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곳이었기에 거리의 풍경 하나하나가 생각지 않았던 선물을 받은 것처럼 즐겁다. 거리의 끝에서 다시 해안으로 돌아가는 길. 케밥의 일종인 두룸Durum과 터키 식 요거트 아이란Ayran으로 간단하게 요기를 하고, 다시 반대편의 코낙으로 돌아가는 배에 오른다. 카르시야카에 도착했을 때와는 달리, 해질 무렵에 카르시야카에서 출발하는 배는 한산하다. 이즈미르 만을 감싸고 있는 언덕 아래로 해가 서서히 떨어지며 하늘과 바다를 붉게 물들인다. 매일 같이 이 풍경을 볼 수 있는 이즈미르 사람들이 꽤나 부럽게 느껴진다. 배위로 부드럽게 불어오는 에게해의 바람에 언젠가 다시 이즈미르에 돌아오리란 바람을 실어 보낸다.

 

포차Foça

포차는 이즈미르에서 차를 타고 북쪽으로 약 40분 거리에 있는 작고 아기자기한 해안 지역으로 과거 이오니아의 고대도시 포카이아가 자리했던 곳이다. 기원전 3천 년경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한 포차에는 오랜 시간 이어져온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숨어 있다.

과 만을 잇다, 에스키 포차

이즈미르 시에서 차를 타고 포차로 가는 길. 밀크티 색 바위산과 올리브 나무가 이어지고, 배경으로 펼쳐지는 에게해는 터키석처럼 푸르다. 포차는 에스키 포차와 예니 포차로 나뉘는데, 에스키Eski는 ‘오래된’, 예니Yeni는 ‘새로운’이라는 뜻이다. 언덕 위에 오래된 풍차가 서 있는 풍경을 지나 에스키 포차에 도착했다. 두 개의 만으로 이루어진 에스키 포차를 넓은 만에서 출발하여 해안선을 따라 작은 만으로 걸어가기로 한다. 넓은 만에는 많은 요트들이 정박해 있고, 그 앞으로 바다표범의 동상이 서 있다. 고대도시 포카이아Phocaea의 이름은 바다표범을 뜻하는 그리스어 ‘Phoka’에서 유래된 것.

예로부터 바다표범은 바다의 신 포세이돈과 태양의 신 아폴로로부터 보호를 받는 신성한 존재로 여겨졌는데, 오래 전부터 포차 앞바다에 있는 섬들에 지중해 몽크 바다표범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자연스럽게 포차의 상징이 되었다. 이 작은 마을을 자신들의 삶의 터전으로 택한 녀석들. 그런 녀석들을 보호해주었다는 두 신 아폴로와 포세이돈. 작지만 한가로운 포차가 유달리 달라 보였던 이유였다. 해안선을 따라 작은 만과 넓은 만을 나누는 작은 반도로 걸어간다. 이 반도에 세워진 성벽은 1678년 오스만에 의해 지어진 것으로 세계문화유산 후보에 올라있다. 돌조각들은 크기와 모양이 제각각이지만 오밀조밀하게 쌓여있는 모양새가 더없이 단단하다. 성벽의 외곽에 대지의 여신이자 오랜 세월 포차 사람들이 신성시해온 키벨레Kybele의 사원이 있다. 여신을 새겨놓은 돌의 크기는 작지만 이곳에 들러 신의 가호를 빌었을 뱃사람들은 세상 든든한 마음으로 항해를 떠났을 것이다.

반도를 돌아 작은 만으로 접어드니 새로운 항구의 풍경이 펼쳐진다. 하나같이 터키 국기를 달고 있는 낚싯배들이 둥그런 만을 따라서 줄지어 서 있고,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레스토랑들이 서로 어깨를 맞댄 채 자리하고 있다. 세상 느긋한 포차의 고양이와 개들은 배 위에서, 거리에서 달콤한 낮잠에 빠진 모습. 바닷가 마을답게 한편에는 어시장의 모습도 보인다. 시장 입구에 물고기 그림들로 만든 포차의 이름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INFO. 포차로 가는 길의 유적들

타스 에브Taş Ev
기원전 4세기경 페르시아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소아시아의 고대 국가 리디아에 지어진 페르시아 통치자의 무덤으로 당시 페르시아의 강한 영향력을 알 수 있게 해주며 2001년부터 보수를 거쳐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헤로도투스 벽Herodotus Sur
고대 포차에는 5킬로미터에 달하는 성벽이 존재했었다고 한다. 이곳에 묻혀있던 페르시아의 화살과 항아리 등을 통해 과거 이곳에서 페르시아와 포카이아 사이에 큰 전투가 있었고, 당시 페르시아가 승리했음이 밝혀졌다.

극장Tiyatro
기원전 4세기경에 지어진 이 극장은 아나톨리아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극장으로 알려져 있다. 내구성이 좋지 않은 응회암으로 만들어져 현재 일부분만 남아있는 상태이다. 곧 대대적인 발굴 작업이 이루어질 예정이다.

INFO. 시란 바위Siren Rock

화산 작용에 의해 생긴 구조로 포차 해변에 있는 아주 작은 섬이다. 널리 알려진 이름은 세이렌Seiren. 전설에 의하면 시란은 여성의 얼굴과 새의 몸을 가졌으며 신비로운 노래로 항해하는 선원들을 매혹시켜 종종 조난 사고를 불러일으켰다고 한다. 시란 바위는 그 전설의 주인공인 시란이 실제 살았다고 여겨지는 곳으로 오락Orak섬 북서쪽에 위치해있다. 포차에는 시란 바위와 바다표범을 만나고 오는 투어 프로그램뿐만 아니라 포차의 해안선을 따라 작은 섬과 아름다운 만으로 향하는 데이 투어 상품이 마련되어 있다.

INFO. 지중해 몽크 바다표범Mediterranean Monk Seal

과거 경제적인 가치로 인해 지중해 몽크 바다표범에 대한 남획이 이루어졌고, 그로 인해 지금 지중해 몽크 바다표범은 전 세계적으로 400여 마리 정도밖에 남아 있지 않은 멸종위기종이 되었다. 포차에 있는 작은 섬들과 바다동굴이 현재 지중해 몽크 바다표범들이 살고 있는 귀한 서식지이며 포차시 정부는 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포차의 마법, 카라타스

바다가 잘 보이는 레스토랑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이곳 사람들이 즐겨 먹는 생선인 레드 말릿Red Mullet튀김과 쥐베스Civez라고 하는 에게해 연안의 대표적인 샐러드 그리고 밑반찬 개념의 메제Meze를 주문했다. 식전 빵과 쥐베스에 올리브기름을 곁들이고, 작은 레드 말릿을 포차 사람들처럼 손으로 집어먹는다. 고소하고 기름진 풍미가 입 안 가득 퍼지고, 다양한 종류의 메제가 뒷맛을 깔끔하게 잡아준다.

텁텁한 터키 커피로 입가심을 하고 밖으로 나오니 장바구니를 든 사람들이 눈에 띈다. 사람들을 따라가니 가는 날이 장날이다. 신선한 과일과 야채는 물론이고, 다양한 물건을 파는 좌판이 늘어서 있다. 우리네 시골 풍경처럼 꽃무늬 고쟁이를 입고 장을 보는 포차 할머니들의 모습이 정겹다. 자갈길을 따라 이어지는 마을에는 포차의 해안과는 또 다른 오래된 정취가 머물러 있다.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에 의하면 포차에서 신비의 돌, 카라타스를 밟은 이는 마법에 걸려 반드시 포차로 돌아오게 된다고 한다.

하지만 그 돌이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는 누구도 알지 못한다고. 카라타스는 아마 포차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못다 전해들은 포차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날을 꿈꿔본다.

INFO. 포차의 수호 동물들

그리핀Griffin
그리핀은 동방의 신화에서 나온 혼종 동물로 포카이아의 상징이었다. 과거 포카이아의 동전에도 등장했으며 사원의 벽에도 장식되곤 했다.

Horse
포카이아의 또 다른 수호 동물, 말. 포차 사람들이 숭배하는 신, 아테네가 말들을 길들인 것으로 묘사되며 그리핀과 함께 사원의 벽들에 장식되었다.

수탉Rooster
수탉은 이 지역에서 오랫동안 부활과 깨달음, 힘을 상징하는 존재로 여겨졌고, 황금수탉이 포차의 어딘가에 숨어 있다는 비밀스런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베르가마BERGAMA

이즈미르에서 북쪽으로 약 100킬로미터 거리에 위치한 베르가마는 고대 페르가몬 왕국의 찬란한 역사를 품고있는 도시로 문화, 예술, 철학 등 여러 분야에 걸쳐 눈부신 발전을 이루어 놓은 곳이다. 헬레니즘과 로마 그리고 비잔틴과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문화가 차례로 머물다 간 찬란한 흔적들이 여전히 베일에 싸인 채로 호기심 많은 여행자들을 맞이한다.

 

붉은 신전, 크즐 아블루

터키어로 크즐Kızıl은 붉은색을, 아블루Avlu는 뜰을 뜻한다. 붉은 벽돌로 지어졌기 때문에 ‘붉은 대성당’ 또는 ‘레드 바실리카’ 등으로 불린다. 요한 계시록에 의하면 소아시아의 7대 교회 중 한 곳이 이곳에 자리했었다고 한다. 현재 남아있는 크즐 아블루는 2세기경 로마제국의 하드리안 황제에 의해 이집트의 여신 세라피스Serapis에게 바치는 신전으로 지어진 것이며, 비잔틴 제국 시기에는 기독교 교회로 쓰이기도 했다. 본토에서 상당한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이곳에 이집트의 신을 모신 신전이 지어진 것을 통해 당시 이집트 신앙의 영향력을 짐작해볼 수 있다. 원래 붉은 벽돌로 지은 건물 위에 대리석이 덧붙여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대리석은 떨어져 나가고 붉은 외벽만이 남아 있는 모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웅장한 위용이 인상적이다. 건물 주변으로 무너져 내린 건물 잔해가 널려있고, 복원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다. 무너지지 않은 일부 문은 원형에 가까운 모습으로 남아 있어 아름다운 조형미로 전성기의 모습을 상상케 만든다.

본디 있어야 할 자리를 찾지 못하고 조각조각으로 흩어져 있는 빛바랜 고대도시의 흔적들을 바라보고 있으니, 찬란한 과거의 영광과 현재의 쓸쓸한 풍경이 때마침 먼 곳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교차된다.

 

찬란한 폐허, 아크로폴리스

헬레니즘 시대부터 일대의 종교와 문화 예술의 중심지였던 베르가마의 유산은 아크로폴리스에 집약되어 있다. 차를 타고 베르가마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언덕의 꼭대기에 위치한 아크로폴리스로 향한다. 수천 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건물들은 대부분 무너져 잔해들이 사방에 흩어져 있지만, 그 터를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당시 번성했을 도시를 떠올려보기에는 모자람이 없다.

가장 먼저 발길이 닿은 곳은 헬레니즘 건축을 대표하는 걸작, 제우스 대 제단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터이다. 1878년 독일에 의해서 베르가마 아크로폴리스 유적과 유물에 대한 대규모 발굴 작업이 진행되었는데, 이때 제우스 대제단 유적의 대부분이 바다 건너 독일로 옮겨져 지금은 베를린에 있는 페르가몬 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다. 아크로폴리스에서 가장 오래된 신전인 아테네신전의 남아 있던 입구 부분도 통째로 베를린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어째서 그들이 이 땅의 찬란한 유적을 가지고 갔는지 진심으로 묻고 싶다. 제우스 제단과 아테네 신전이 자리했던 넓은 부지에 덩그러니 서 있는 몇 그루의 나무가 쓸쓸한 인상을 전한다.

가파른 경사면을 따라 지어진 원형극장은 베르가마를 대표하는 풍경이다. 위에서 극장을 내려다보면 급경사에 발이 얼어붙을 것 같이 아찔한 기분이 들지만 그와 동시에 정면으로 펼쳐지는 베르가마의 전경은 더없이 극적이다. 무대가 있어야 할 자리에 돌로 된 구멍만이 여러 개 남아 있는 것은 바로 옆에 있는 술의 신 디오니소스의 신전을 가리지 않기 위해 공연 때는 간이 무대를 만들었다가 끝나면 철거하는 식으로 운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원형극장 위쪽으로 발길을 옮기면 페르가몬 도서관 터로 이어진다. 베르가마는 오래전부터 그리스 문화의 중심지로서, 페르가몬 도서관은 당시 최대의 장서를 보유한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버금갈 정도였다. 이에 위협을 느낀 이집트가 파피루스 수출을 중단하자 페르가몬에서 그 대체품으로 처음으로 양피지를 생산하게 되었다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해진다.

로마시대에 황제의 신전을 건축하는 것은 도시의 큰 영광이었다. 고대 도시 페르가몬도 영광스러운 명령을 받아들여 언덕 위에 위치한 아크로폴리스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하얀 대리석으로 트라이아누스 황제의 신전을 짓기 시작했고, 하드리안 황제때 이를 완성했다. 트라이아누스 신전은 아크로폴리스에서 가장 빛나는 유적이지만, 역시 남아 있는 것은 일부 기둥과 신전을 받치고 있는 아치형 구조물 정도. 본디 있어야 할 자리를 찾지 못하고 조각조각으로 흩어져 있는 빛바랜 고대도시의 흔적들을 바라보고 있으니, 찬란한 과거의 영광과 현재의 쓸쓸한 풍경이 때마침 먼 곳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교차된다.

 

희망이라는 이름의 치유, 아스클레피온

‘신의 이름으로 말하노니, 죽음은 이곳에 들어갈 수 없다’. 입구에 새겨진 글귀를 지나 대로를 따라 걸어 들어가니 고대의 병원, 아스클레피온이 눈앞에 나타난다. 뿌리 부분만 남아 있는 기둥에 뱀의 형상이 새겨져 있는데, 뱀이 허물을 벗고 새 생명을 얻듯이 아스클레피온에 온 환자는 질병에서 벗어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 신전, 회복의 신 텔레스포루스Telesphorus신전을 비롯해 환자들을 위한 도서관, 목욕탕, 극장 등이 자리하고 있어 고대의 병원이지만 현대의 기준으로 가늠해보아도 상당히 체계적인 시설이었음을 알게 해준다. 지하에 아치형으로 만들어진 통로가 있는 것이 특이하다. 천장의 구멍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이 바닥을 비추고 있는 모습. 아스클레피온에서는 환자를 치료할 때, 정신적인 부분을 중요시했다고 한다. 환자들은 이지하통로를 거쳐서 치료소로 이동했는데. 좋은 목소리를 가진 의사들이 이 통로 위로 난 구멍을 통해 “너는 곧 나을 것이다. 너는 좋아질 것이다”라고 말하며 환자들에게 회복에 대한 희망과 믿음을 주었다고 한다. 하늘에서부터 내려오는 희망의 목소리를 들으며 환자들은 치유를 소망하고 회복에 대한 의지를 다잡지 않았을까. 물리적인 치료와 함께 삶에 희망과 소망을 전해주고자 했던 누군가의 따뜻한 마음을 떠올려본다.

 

퍼즐의 완성, 베르가마 박물관

베르가마를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박물관에 들렀다. 베르가마 박물관은 처음에 아크로폴리스에서 발굴된 유물을 모아두는 창고 개념으로 지어졌다가, 1936년에 제우스 제단을 본떠 만든 새로운 건물로 이전하며 고고학 박물관으로 문을 열었다. 박물관 앞뜰에 놓여 있는 오스만 시기의 묘비들을 지나 박물관 내부로 들어간다. 많은 유물이 해외로 유출되었음에도 베르가마 및 인근 지역에서 출토된, 만여 점에 달하는 방대한 양의 청동기, 로마, 비잔틴 시기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는 점이 놀랍기만 하다. 아스클레피온에서 보았던 뱀의 형상이 새겨진 기둥을 이곳에서도 볼 수 있는데, 박물관에 있는 것이 진품이고, 아스클레피온에 있는 것은 모조품이라고 한다. 한편에 제우스 대 제단의 작은 모형이 놓여 있는데 진품은 베를린에 있는 페르가몬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그리스 로마 시대의 석상들은 약탈과 훼손으로 온전하게 남아 있는 것을 찾기 어렵지만 사실감이 뛰어난 옷의 주름과 섬세한 피부결의 표현은 감탄을 부른다. 아스클레피온에서 발견된 하드리안 상, 메두사 머리 모자이크, 트라이아누스 신전에서 출토된 승리의 여신 니케 상 등 유물들이 원래 자리에 있었을 모습을 떠올리며 베르가마의 퍼즐을 하나씩 맞추어본다.

INFO. 베르가마의 집들

베르가마는 18세기 시절의 가옥들이 다수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리스와 터키의 전통적인 양식이 혼합되어 지어진 집들은 빛바랜 파스텔 톤색감으로 편안하면서도 산뜻한 분위기. 대부분이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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