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학자 박혜란이 일흔에 알게 된, 즐겁게 나이 드는 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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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내용

 

 

그녀는 자리에 앉자마자 인터뷰 장소를 찾지 못해 주변에서 잠깐 헤맸던 이야기를 꺼낸다.

“처음 오는 길이고 헤매고 싶지 않다 보니 긴장하게 되잖아요. 자꾸 간판을 살피게 되고요. 인생이 그런 것 같아요. 이렇게 편히 마음을 가지면 저렇게 쉽게 보이는데 뭔가 정답을 찾으려고 발버둥 치면 더 안 보여요.”

완벽을 추구하기보다 여유를 갖고 ‘대충대충 살자’는 것이다. 여성학자로 육아 멘토로 전국을 돌며 강연하고 저술, 사회운동 등을 하며 다이내믹하게 사는 박혜란은 최근 <오늘, 난생처음 살아보는 날>이란 책을 냈다. 그녀가 칠순을 맞아 쓴 책이다. 50대 초반 <나이 듦에 대하여>를 쓰고, 60대가 되어 <다시 나이 듦에 대하여>를 쓰고, 70대가 되어 다시 쓴 나이 듦에 대한 책이다. 책에는 한층 가까워진 죽음 앞에서, 앞으로 과연 어떻게 하루하루 나이 들어갈 것인가에 대한 박혜란의 유쾌한 고민이 담겼다.
 

50대, 60대, 70대, 10년 주기로 나이 듦에 대한 에세이를 냈는데, 어떤 변화가 있던가요?

50대는 나이 듦에 대해서 당혹감이 있지요. ‘세상 모든 사람은 늙어도 나는 안 늙을 거다’ 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가 몸에 닥친 변화를 보며 놀라는, 생물학적으로 늙음을 자각하는 때이지요. 저에겐 어떻게 잘 늙을 것인가를 모색한 시기였어요. 60대는 몸은 종합병원이지만 심적으로는 점점 여유로워졌어요. 그래도 노인이란 생각은 안 했어요. 혹 누가 60대를 노인이라고 하면 화가 났죠. 100세 시대니까 ‘60대 중반까지는 신중년’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지하철에서도 마음 착한 청년들이 자리를 양보해도 ‘금방 내린다’며 앉질 않았어요. 그런데 ‘70 노인’이라고 말해보세요. 입에 착 달라붙지 않나요? 70은 중년이라고 할 수 없지.
 

노인이 됐다는 생각에 섭섭하지 않나요?

왜 서글퍼요. 내가 최대치로 산다고 해도 90세까지예요. 90에서 60을 빼면 30이야. 그러면 남은 생이 길게 느껴져요. 그런데 70을 빼봐, 느낌이 확 달라지잖아요. 이제는 ‘진짜 죽음을 향해서 한 발 한 발 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가까운 사람들의 죽음과도 마주하고요. 물론 친한 친구 몇 명이 40대에 죽었어요. 대부분 사고사지요. 그런 죽음은 상실감이 크지만 나와 연결이 안 돼요. 왜냐? 그때 나는 젊었기에 ‘살면서 이렇게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사건도 일어나는구나’ ‘인생이 스타카토로 끝날 수 있구나’ 하는 정도죠. 60대 들어서 죽는 친구들은 대개 병으로 죽어요. 이 죽음은 노화잖아요. 이때는 ‘나도 저렇게 죽을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거지. 내가 죽음과 더불어 산다는 걸 깨닫는 겁니다. 그러니까 오늘이 덤인 거지요. 가령 누가 돈 빌려 가서 안 갚아도‘그게 무슨 대수인가? 그 돈이 없다고 내가 못사는 게 아닌데’ 하면서 삶의 태도가 달라지죠.
 

어떤 모습으로 죽음을 맞이하고 싶나요?

제일 바라는 죽음은 영화 <안토니아스 라인>에 나오는 죽음이에요. 의지가 굳은 한 여성이 주체적으로 농장을 일구고 가족을 만들어가는 영화죠. 주인공은 어느 날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불러 모아 ‘널 만나서 좋았다’ 하며 마지막 인사를 나눠요. 다음 날 아침 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고 평화롭게 눈을 감았어요. 삶의 질 못지않게 죽음의 질도 중요해요. 병상에 누워 바늘 줄줄이 꽂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채 삶을 마무리하는 것은 생각해볼 문제지요.
 

책 제목을 ‘오늘, 난생처음 살아보는 날’이라고 한 이유네요.

나이가 들면 ‘오늘이 어제 같고, 어제가 오늘 같다’고 그러잖아요. 젊을 때도 오늘 하루가 난생처음 살아본 날이었지만 그땐 잘 몰랐어요. 일흔이 되니 내 인생이 어디서 끝날지 모르니 오늘 하루가 귀한 날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하루하루가 소중해진 거죠.

 

결국 나이 듦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중요하군요.

‘오늘이 처음 살아본 날이다’ 하고 생각하면 쓸데없이 누구를 미워하거나 가기 싫은 곳에 억지로 가지 않아요. 남 눈치 안 보고 나에게 집중하게 되는 것이죠. ‘오늘이 나의 전성기’라고 생각하며 사는 것이죠.

 

굉장히 긍정적이시네요.

부모님에게 물려받았어요. 아버지는 초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한 말단 공무원이었지만 당신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하다고 생각했죠. 가난하고 배운 것 없지만, 최선을 다해 노력했고 거짓말 안 하고 산다는 자부심이 대단했어요. 많은 분들이 ‘고통 없이 자다가 죽는 것이 소원’이란 말을 많이 해요. 그건 ‘신이 허락한 죽음’이라고 합니다. 아버지가 그렇게 가셨어요. 어머니가 아침에 일어나서 보니까 아버지가 돌아가셨지요. 자식들 누구도 슬퍼하지 않았어요. 아픈 곳 없이 편안하게 가셨고, 행복하게 사시다 가셨다고 받아들였죠. 주관적으로 행복하게 사신 분이셨어요.
 

주관적 행복이란 뭘까요?

‘행복해지고 싶으면 무뎌지라’는 이야기를 자주 해요. 그런 분들의 특징이 관계에 대해서 크게 신경 안 써요. 남의 눈치도 안 보죠. 아니 안 보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눈치를 줘도 못 보고요. 곁에 있는 사람은 답답하죠. 그러나 당사자는 행복하지요(웃음).
 

나이가 들면 여유로워질 것 같은데, 의외로 고집이 더 세지기도 합니다.

오래전에 그 이유를 의학적으로 풀이하는 강연을 들은 적이 있어요. 나이가 들면 근육이 빠져요. 그러면서 마음 근육도 줄어든다는 겁니다. 나이가 들면서 우리가 생각하는 고정관념에서 너그러워질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절대로 아니라는 거지요. 근육이 상실되는 만큼 마음 근육을 키우려고 노력해야 된다는 거예요. ‘옛날에 나는 이러지 않았는데’ ‘예전에 나는 참 괜찮은 사람이었는데’ 하며 과거에 머물러 있으면 그 사람은 속 좁은 인간으로 계속 사는 거죠. 나이가 들수록 마음 근육을 키우기 위해 더 노력을 해야 내 삶도 여유로워질 수 있어요.
 

얼굴 표정이 무척 편안하신 걸 보면, 마음 근육을 단련하는 노력을 많이 하시는 것 같습니다.

남들이 저에게 표정이 밝다고 하는데, 천성적으로 잘 웃어요. 젊어서부터 심각한 걸 싫어해 농담도 많이 하고요. 나이가 들면 입꼬리가 처져 가만있어도 화난 표정이 된다는데, 저는 자주 웃으니까 편안해 보이나 봐요. 마음 좋은 사람처럼 보인다고 하는데 속은 못됐어요(웃음). 부족한 것도 많고요.

 

책을 보니 가장 좋은 가족 관계는 ‘쿨하면서도 따뜻한 관계’라고 하셨더라고요.

가족 관계가 왜 그렇게 끈적끈적해야 돼요. 그러면서 왜 서로 미워해? 가족은 그냥 좋은 인연, 특수한 인연으로 만난 사람이잖아요. 가족 관계가 나쁜 것은 결국‘기대와 실망의 관계’라서 그래요. 자식이라면, 마땅히 아버지에게 이렇게 해야 하는데 안 하니까 실망하는 거야. 그런데 그 기대는 객관적 기준이 있나? 지극히 주관적이에요. 고부 관계도 그래요. 시어머니들이 며느리에게 ‘일주일에 최소한 두 번은 전화해야 도리가 아니냐’고 말해요. 그러면서 ‘내가 매일 찾아오라는 것도 아닌데’ ‘내가 옛날 시어머니처럼 굴지 않은데’ 하면서 자기 합리화를 하죠. 며느리에게는 일주일에 한 번이 기준일 수 있지요. ‘건강은 어떠세요’ 하고 말하면 다음부터 사실 할 말도 없어요. 자식도 마찬가지예요. ‘아버지라면 내가 결혼할 때 1억은 줘야지’ 하는 기대. 다들 자신이 세운 기준에 안 맞으면 갈등이 오는 거지요. 그게 기대와 실망의 관계예요. 가족 관계라도 지킬 건 지키되 최대한 서로 바살피고 베푸는 관계가 되어야 하지요.
  

가족 간에 기대가 없을 순 없다고 봅니다. 기대치는 어느 정도 가져야 할까요?

인간인 이상, 모든 관계에는 기대가 있어요. 그러나 그 기대치를 최저치로 낮춰야지요. 가령 ‘자식이 나에게 욕만 안 하면 된다’ ‘인사만 잘하면 된다’ 하는 기대 정도만 갖고 있으면 어떨까요. 자식이 ‘아버지 오셨어요’ 하고 인사만 해도 ‘얘가 나에게 이렇게 인사를 잘하는구나’ 이렇게 받아들이면 얼마나 좋아요. 제 아들이 ‘어머니는 며느리의 기준이 뭐냐’고 물어본 적이 있어요. 제가 “내 앞에서 ‘어머니는 왜 이렇게 살림을 못 하세요’ 하는 말만 안 하면 돼”라고 말했죠. 뒤에서는 욕해도 되지만 내 앞에서만 안 하면 돼요. 기대치를 낮추니까 며느리들이 다 예뻐요. 어디서 저런 며느리를 잘 골라 왔을까? 며느리를 골라 온 아들 녀석도 ‘참 괜찮은 녀석이네’ 하고 생각하게 되고요. 가족의 도리를 이야기하고 기대를 높이는 것은 스스로 고단하게 사는 겁니다. 냉정하게 말해 심심해서 그래요. 내 인생이 없어서 그래요. 내가 뭔가를 안 하니까 자꾸 며느리하고 아들만 눈에 보이는 거예요. 내 삶의 재미를 찾아야지요.
 

선생님의 남은 인생을 사는 재미는 뭡니까?

버킷리스트가 있어요. 어느 날 젊은 엄마들에게 ‘아이들에게 올인하지 마라. 당신 자신을 위해서도 살라’고 강연하는데, 한 엄마가 ‘선생님은 꿈이 뭐예요’ 하고 물어요. 즉석에서 떠올린 버킷리스트가 마음에 드는 도시에서 한 달씩 살아보기, 연극 무대에 서기, 캐리커처 배우기, 손주들이 읽을 동화책 쓰기, 제주도 올레 일주 등이에요. 그것들을 이루기 위해서라도 최소한의 건강은 유지해야지요.
 

가장 먼저 실천 중인 버킷리스트는 무엇인가요?

얼마 전에 캐리커처 책을 한 권 샀어요. 연말 즈음에는 고양이를 그릴 수 있겠지 생각하면서 열심히 따라 그리고 있어요. 10년 뒤 80대에 다시 책을 낸다면 아마도 지금의 버킷리스트에 대한 내용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때 살아 있으면 80대의 나이 듦에 관해서 쓸 겁니다. 그때 어떤 이야기가 담길지 오늘, 난생처음 사는 삶이 기대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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