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힌 기억을 추억으로 바꾸는 방법, 발칸 여행

기사 요약글

Balkan 당신과 나의 거리만큼

기사 내용

먼 곳에 있는 그대, 보고 싶었다. 항상 잊지 못하고 끊임없이 되뇌던 당신의 이름, 발칸. 보스니아와 몬테네그로 그리고 세르비아에서 보냈던 꿈같고 때론 여운 깊은 영화와 같았던 기억들. 이제 잡지 못하고 놓지도 못한 채 그 속에서 흘러간 집시의 시간을 추억할 때. 잊힌 기억을 추억으로 바꾸는 방법, 발칸.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몬테네그로 그리고 세르비아. 이 심정적, 지리적으로 먼 낯선 이름의 나라들은 줄곧 유고 슬라비아로 기억되고 있었다. 현재의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 그리고 마케도니아는 이들과 함께 과거의 유고 연방에 포함되어 있는 나라들이었다. 1990년대로 넘어오면서 소련의 붕괴로 각자의 이름을 되찾은 이들은 발칸이라는, 묘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지역으로 묶였고 각자의 나라로 다시 자리를 찾았다.

보스니아의 순박함과 유연함, 몬테네그로의 경건함과 간결함 그리고 세르비아의 자존감과 화려함. 이들의 문화와 기질 그리고 역사와 환경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으면서도 서로 분명히 다르고 또 그렇게 기억되기를 바란다. 슬픔과 아픔이 정확히 교차했고 동시에 공존했지만 이제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자신들의 땅으로 돌아간 그들. 그들이 보여주었던 것 그리고 그들이 말하고 싶었던 것, 그것은 바로 우리는 발칸의 사람들이고 지금은 발칸의 시간이라는 것.

BOSNIA HERZEGOVINA

발칸이라는 이름이 가장 잘 어울리는 곳. 그리고 아직 상처가 아물지 않아 전하지 못한 애환이 녹아있는 곳, 보스니아. 발칸에서 보스니아를 가장 먼저 들러야 하는 것은 이곳이 가장 발칸스러우며 또 집시적이기 때문이다.

 

오래된 스타리그라드, 사라예보SARAJEVO

사라예보의 거리를 걷고 있으면 마치 지난 역사의 한 컷에 들어와 있는 것 같다. 이곳이 바로 세계 1차 대전이 발발된 극적인 현장이기 때문이다. 탕!! 평화로운 일요일,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에게 거칠게 울린 한 발의 총성은 유럽과 러시아 그리고 먼 일본까지 참전하게 되는 대규모 전쟁으로 발전하게 되고, 이는 1차 세계 대전이라는 인류사 최악의 오명 중 하나로 기록되게 된다. 사라예보 중심을 흐르는 밀야츠카Miljacka강에 있는 라틴 다리는 전쟁의 시발점이 된 사건이 벌어진 다리로 지금은 무심히 그저 강 위에서 그 역사의 무게를 지탱하고 있다. 강을 건너기 전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를 저격하고 세르비아인이 숨어 들어갔다던 건물이 있다. 건물은 당시 카페였고 지금은 박물관으로 개조, 운영 중이다. 벽에 당시의 상황을 기록해 놓은 석판이 있다. 구시가지Stari Grad를 걷다 보면 전쟁이라는 딱딱한 단어는 이미 희석되어버린 듯하다. 사람들은 노천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지나간 과거의 일들 보다는 앞으로 벌어질 행복과 사랑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그것은 사람들의 표정을 보면 알 수 있는 아주 단순한 유추이다.

한국을 떠나기 전 발칸이 주었던 다소 우려 섞인 시선들 그리고 긴장 섞인 설렘들. 하지만 의외로 사라 예보에서 그런 우중충한 느낌을 받을 수 없었다. 건물 곳곳에 전쟁 당시의 총탄 자국이 그대로 남아있었지만 사람들은 모두가 호의적이었고 이곳을 감싸는 분위기는 평화로웠다. 그것은 보스니아가, 혹은 사라예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지극히 단순하고 평범한, 일종의 마음이자 건네는 손짓이었다.

사라예보 구시가지 내엔 바슈카르지아Bashcharshiya광장이 있다. 이 광장 주변으로 모스크와 가톨릭 성당 그리고 세르비아 정교회 등 조금은 이질적인 종교 시설이 모두 함께 위치하고 있다. 보스니아는 유럽 대륙에서 거의 유일하게 이슬람교가 국민의 다수를 차지하는 종교로 예전부터 개개인의 종교적인 신념과 색채가 강한 나라였다. 발칸에서 특히 보스니아를 종교와 문화의 모자이크라고 부르는 이유이기도 하다. 지금이야 많이 누그러진 일이지만 예전에 보스니아는 종교적인 신념에 따라 우리와 그들이라는 프레임으로 구분해 왔다고 한다. 하지만 여행자에 대한 시선은 그렇게 정확히 둘로 나뉘지 않은 것 같았다. 여행자는 바로 그들이었고 내가 바로 보스니안이었으며 결국 우리는 모두 같았다. 다소 무뚝뚝한 성격의 보스니안임을 감안한다면 그것은 진실로 환영의 인사였다.

차분하게 깔린 돌바닥을 따라 구시가지 입구까지 가면 작은 탑이 하나 나온다. 마치 티베트의 어디쯤에라도 와 있는 것 같은 특이한 모양의 이것은 1891년도에 건축된 이슬람식 무어풍으로 만들어진 공공수도 세빌리Sebilji샘. 120년간 한 번도 마르지 않았다고 하는 이 샘의 물을 마시면 다시 사라예보로 돌아온다는 속설을 지닌 보스니안들의 성수. 언젠가는 자신이 살던 바로 그 땅으로 반드시 돌아간다는 것. 가장 당연하고 그리운 고백, 사라예보는 애틋하다.

 

  • 가지 후스레프 베그 모스크 26미터 높이의 웅장한 미나렛은 이곳이 사라예보 무슬림들의 성지임을 직감케 한다. 가지 후스레프 베그Gazi Hüsrev Beg는 사라예보에 많은 공공시설과 학교 등을 지어 공헌한 16세기 이곳을 통치했던 오스만투르크인이다.
  • 세르비아 정교회 1837년 오스만투르크의 지배에서 벗어난 후 착공, 1845년에 완공됐다. 내전으로 많은 손상을 입었지만 그리스 정교회의 도움으로 다시 유려한 모습의 건물로 완벽하게 보수되었다. 내부는 엄격하게 사진 촬영을 금하고 있다.
  • 가톨릭 대성당 보스니아에 있는 가톨릭 성당 중 가장 규모가 크며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의 통치기인 1889년에 세워졌다. 고딕 양식과 신 로마네스크가 적절히 혼합된 이 성당 앞에는 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은빛 동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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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예보의 장미, 희망의 터널

잘게 쪼개지고 벌어진 발칸의 역사에서 보스니아는 완전히 성격을 달리한다. 유고슬라비아로부터 독립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보스니아계와 세르비아계 간의 민족, 종교 그리고 인종적 분쟁. 이들에게 유럽의 화약고라는 달갑지 않은 타이틀이 건네진 보스니아 내전 시절. 사라예보에서 외곽으로 차를 몰아 20여 분, 벌판을 지나 한동의 평범한 건물이 나타난다. 바로 모든 보스니안들이 절대로 잊지 않을 장소인‘희망의 터널’. 보스니아 내전 당시 세르비아 군인들에게 고립되었던 사라예보 시민들에게 물자 수송을 했던 비밀의 생명 터널. 건물은 단순하게 가옥의 형태를 띠고 있는데 이는 철저하게 집으로 위장된 시설물로 보이기 위함이다. 외벽에는 당시의 총탄 자국이 그대로 드러나 있어 당시의 참상을 전해주고 붉은색으로 칠해진 앞마당의 자국은 당시에 포탄이 직접 떨어진 장소를 붉게 채색해 피폭의 이미지를 잊지 않기 위함이라고 한다. 보스니안들은 이 흔적을‘사라예보의 장미’로 명명해 기억하고 있다. 집 안으로 들어가면 지하 갱도처럼 터널이 이어지고 별도로 마련된 공간에는 당시의 상황을 급박하게 촬영한 영상물이 상영되고 있다. 이 생존만이 절대적인 목표가 되었던 공간을 희망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붙여 추억하는 사라예보 사람들. 당신들에게 경의를 표하며.

INFO. Believe it or not

보스니아에도 거대 피라미드가 있다?
보스니아의 정중앙 부분인 비소코Visoko 마을에서 발견된 건축시기가 무려 12,000여 년 전이라는 피라미드. 이집트의 피라미드보다도 훨씬 크고 오래된 이 인류사의 기적은 그러나 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하고 과학적인 견해가 달라 아직까지 학계에서 정설로 받아 들여지지는 않고 있다.

 

모든 보스니안들의 어머니 강, Vrelo Bosne 공원

지도를 보면 파란 물줄기가 희미하게 시작되어 전 보스니아에 퍼져 나가는 지점이 있다. 바로 보스니아 땅의 젖줄인 보스니아 강의 수원지. 전 유럽을 통틀어 가장 많은 지하수가 나오는 곳으로 알려진 이곳에만 아홉 개의 지하 수원이 있고 이곳에서 끊임없이 엄청난 양의 물이 쏟아져 나와 보스니아 땅 전체를 적신다. 보스니아의 모든 물은 이곳에서 시작되고 나누어지며 먼 길을 떠난다. 보스니아라는 나라 이름도 바로 이곳에서 흘러내린 물이 강을 이룬 보스니아 강에서 유래된 것이고 Vrelo 또한 보스니아어로 원천이라는 뜻이니 이곳은 모든 보스니안들의 노스탤지어일 것이다. 한적한 공원으로도 꾸민 곳이지만 마치 폭포에서 물이 흘러내리는 것처럼 압도적인 울림이 있는 곳.

지하 깊숙한 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로 실제로 바로 음용도 가능하다. 맑은 물의 증거는 호수에 유유히 떠다니는 백조들과 강바닥의 송어떼들. 마침 비가 온 후 안개가 자욱하게 공간을 휘감고 이어 햇빛이 나지막하게 나무들 사이로 퍼지면 이곳에서 의외로 보스니아 최고의 시간을 가질지도 모르겠다.

 

코니츠KONJIC

사라예보에서 남서쪽으로 약 5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코니츠는 보스니아 최고의 관광지인 모스타르로 향하는 중간 지점에 있는 작은 마을이다. 마을 한 가운데로 네레트바Neretva강이 지나고 다리 건너편에 역시 대형 모스크와 가톨릭 성당의 첨탑이 어우러져 있어 평온함이 가득하다. 강변의 카페에 앉아 특유의 무거운 터키식 커피를 마시며 그저 강을 바라보는 것. 바로 코니츠에서 할 일.

지하 세계, 티토의 벙커

지하벙커는 코니츠 마을에서 강을 따라 산길로 20여 분 가면 나온다. 한 나라의 역사를 단순히 그곳을 찾은 여행자가 평가하고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당시 티토가 없었다면 발칸 전체가 독일의 점령 하에 놓였을 것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는 듯하다. 정부 방위군을 통해 미리 허락을 받아야 하고 입구부터 경계가 삼엄해 마치 비밀스러운 현장에 들어서는 것 같은 이 시설은 특이하게 내부가 아닌 외부의 사진을 찍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 희망의 터널과 마찬가지로 산속에 있는 흔한 가정집처럼 생긴 벙커는 1950년에 핵 공격에 대비한 티토의 지시로 설계된 것으로 발칸 지역 곳곳에 지하 벙커가 열 곳 이상이 있다고 한다. 270미터 깊이에 26년 동안 만들어진 이 벙커는 용도가 다른 수많은 시설과 갖가지 관계 장비들로 가득 차 있으며 6개월 동안 외부의 지원 없이도 독자적으로 살 수 있다고 한다. 전시물에 쓰여 있는 집시라는 글자가 그렇게 가슴에 와 닿았던 티토의 벙커. 그 치밀함과 철저한 준비성. 티토가 이룩해 놓은 또 하나의 지하 왕국.

INFO. 티토Josip Broz Tito1892~1980

공산주의 혁명가이자 유고의 초대 대통령. 발칸의 민족적 정신을 묶어 유고슬라비아 라는 국가를 창조해냈으며 나라를 안정적으로 운영해 많은 국민들로부터 추앙을 받기도 했지만 독재자라는 부정적인 시선도 함께 가지고 있다.

 

성모의 발현, 메주고리예MEDUGORJE

슬라브어로‘산과 산 사이의 지역’이라는 뜻인 메주고리예. 몇십 년 전만 해도 사람이 많이 살지 않았던 한적한 시골 마을인 메주고리예는 1981년 6월 24일, 이곳에서 기적과도 같은 일이 일어난 이후 전 세계적인 가톨릭 성소로 알려져 오고 있다. 마을에 사는 10대 소년 6명이 뒷산 언덕 위에서 성모 마리아를 직접 만난 것.

소년들의 성모 발현 주장을 놓고 가톨릭교회와 과학계 등의 의견이 분분한 탓에 아직까지는 성모 발현지로 공식화되지는 못했지만 일반 가톨릭 신자들은 인정하는 경향이 강해 매일 전 세계 각지에서 온 가톨릭 신도들의 영성 어린 방문을 받고 있다. 뒤뜰에 있는 ‘치유의 예수상’에는 많은 신도들이 예수상에 손을 얹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를 하고 있어 신비감을 더한다. 슬로베니아 국민들의 성금으로 세워졌다는 예수상의 오른쪽 다리 무릎에서 미세하게나마 성수가 나온다고 알려져 있어 그 기적을 체험하려는 신도들의 방문이 미사가 없는 날에도 끊임없이 이어진다. 조용한 마을에서 벌어진 기적, 수천 명이 보여주는 현장의 엄숙함 그리고 메주고리예에서 체험하는 종교적 기적. 그것이 바로 보스니아의 유연성.

물의 극장, 폭포 크라비카KRAVICA

Vrelo Bosne만큼 중요한 물이 가득한 곳, 크라비카 폭포. 발칸의 지도를 펼쳐놓고 보면 보스니아 땅은 정말이지 국토에서 숨 쉴 만큼만 바다로 열려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 이유로 그들에게 물이란 정말이지 다른 개념이고 성스러운 대상. 야트막한 산 위로 올라가 어디선가 굉음의 물소리가 들리는 곳을 따라가면 여러 갈래에서 쏟아져 나오는 물의 쇼가 보이는 크라비카 폭포가 나온다. 마치 물이 커튼 뒤에서 나오듯, 등장한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이곳은 그래서 물의 극장처럼 느껴진다. 겨울을 향해 가는 계절이라 폭포 아래를 흐르는 물에 몸을 담그는 사람이 없지만 여름 시즌 이곳은 보스니아 각지에서 수영을 즐기려고 찾아오는 사람들로 가득해진다. 그저 바라만 보아도 좋은 곳들 중 한 곳. 나이아가라의 보스니아 버전.

 

모스타르MOSTAR

보스니아의 정식 국호는 ‘Bosnia and Herzegovina’. 나라 이름에 and가 들어가는 것은 다소 생소한데 이는 원래 북부의 보스니아 지역과 남부의 헤르체고비나 지역이 합쳐진 결과이기 때문이다. 하나가 되지 않았다면 분명 남쪽을 대표하는 수도가 되었을 곳 그리고 보스니아로 여행을 온 거의 모든 사람들이 찾아오는 곳, 모스타르.모스타르는 ‘다리를 지키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도시를 흐르는 네레트바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인 스타리 모스트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설명되는 곳이다. 오스만투르크의 지배를 받던 시절인 16세기 중반에 만들어진 이 아름다운 아치형 다리는 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참혹했던 전쟁이라 불리는 1993년 보스니아 내전 당시의 포격으로 처참하게 무너졌지만 지금은 다시 재건되어 현재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바 있다.

다리 입구에 놓인 돌에는 ‘Don’t forget 93’이라는 글귀가 쓰여 있는데 그 뜻은 미루지 않고도 짐작이 가능하다. 1,088개의 돌로 만들어졌으며 이슬람 건축이 유럽에 남긴 교각들 중 가장 아름다운 걸작으로 평가받는 이 스타리 모스트는 완공되었을 당시 세계에서 가장 긴 단일 구간 다리였다고도 한다. 다리 위에 서면 네레트나 강에 모스타르 전경이 펼쳐지지만 이 다리를 경계로 내전 당시 모스크가 보이는 오른 편의 이슬람계와 반대편의 가톨릭계 사람들이 서로 극렬하게 반목했다고도 한다. 이 다리는 그러나 지금의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를 묶어주고 또 과거 서로 반대편에 섰던 모든 모스타르 사람들 양쪽의 손을 맞잡아 주는 역할을 한다. 이 중간의 지점에 놓여있는 다리는 그래서 단순한 구조물이 아니다. 그 거대한 화해의 은유. 보이지 않는 용서가 가득한 곳, 모스타르 그리고 그 다리, 스타리 모스트.

자, 이제는 아픔은 뒤로하고 현재 모스타르의 아름다움과 마주할 시간. 어쩌면 이것이 진짜 모스타르가 지니고 있던 원래의 모습일는지도 모르겠다. 구시가지로 들어가는 입구부터 조금은 울퉁불퉁한 바닥의 자갈길이 이어지지만 꾸미지 않은 순수함은 더욱 모스타르에 빠지게 되는 작은 단서들. 중심으로 들어서면 관광객들을 맞이하는 갖가지 상점들과 다른 유럽 국가들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의 착한 가격대를 갖춘 레스토랑이 즐비하다. 겨울이라 비시즌인 까닭에 호객 행위도 심하지 않다. 뒷짐을 지고 약간 느린 걸음으로 골목골목을 거닐다 보면 갑자기 지나치는 흰색 고양이에, 문 앞에 놓여있는 빨간색 올드카에, 집 담장 밖으로 빼꼼히 나와 있는 석류나무에, 점점이 박히는 모스타르에 남을 앞선 추억들이 미리 떠오른다.

다리를 제대로 볼 수 있는 강변으로 내려오자 사람들이 웅성거린다. 한 사내가 다이빙 준비를 하고 있는 모습이 보이고, 곧바로 강 아래로 뛰어내린다. 오랫동안 모스타르 남자들이 사랑하는 여자한테 구애할 때 했다던 전통적인 다이빙. 그러나 지금은 관광객들에게 일정한 액수를 받고 차디찬 강으로 뛰어내리는 관광 상품으로 바뀌었다. 서로 간에 겨눴던 질시와 미움을, 이제는 전쟁보다 지독한 현실로 승화시킨 모스타르 사람들. 그래서인지 더욱 애잔함과 서글픔이 맞물리는 곳. 모스타르, 슬프되 아름답기를.

조금은 울퉁불퉁한 바닥의 자갈길이 이어지지만 꾸미지 않은 순수함은 더욱 모스타르에 빠지게 되는 작은 단서들.

 

이슬람 수도원, 테키아TEKIJA

모스타르에서 남동쪽으로 15킬로미터, 블라가이라는 작은 마을에 비밀스러운 이슬람 수도원이 있다. 산길을 따라가다 보면 정밀하게 수직으로 잘린 것 같은 거대한 암벽이 나타나고 그 밑으로 마치 속세에서 일부러 멀어진 듯 숨어있는 자그마한 이슬람 수도원, 테키아가 보인다. 암벽 밑으로는 브렐레 보스네와는 비교도 안 되는 엄청난 물이 쏟아져 나오는 동굴이 있어 신비감을 더하는 곳.

테키아는 이슬람에서도 가장 금욕적인 종파로 알려진 더비쉬Dervish수도원이며 16세기 초반 터키 수도승의 요구로 세워졌다. 과거에는 오로지 신을 위해 기도하는 은둔의 수도사들로 가득했지만 지금은 여행객들에게 이슬람의 교리를 전파하고자 개방하고 있다. 여성의 경우 스카프로 머리를 감싸고 가급적 살을 드러내지 말아야 입장이 가능한 복장 규제가 있지만 입구에서 가릴 것을 무료로 나누어 주기 때문에 미리 준비할 필요는 없다. 수도원 내부는 나무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발을 디딜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는 필연적인 소음. 동작 자체에서 조심성이 요구되는 이유는 바로 이런 이유이고 이것이 테키아에 신성함을 더한다. 아주 작은 크기의 기도실은 수도승이 몇 날 며칠을 오로지 신에게 기도하기 위해 스스로 가둬진 극도의 신성한 공간. 한 남성이 2층의 발코니로 나와 아잔을 부르고 그 소리가 부나강Buna river과 만나기 위해 격하게 흘러가는 물소리와 함께 어우러지는 묘한 장소. 지구 상 가장 신성한 두 가지인 종교와 물이 만나는 곳, 테키아.

 

오래된 요새, 쿨라 포치텔KULA POCITELJ

포치텔 마을은 크로아티아의 국경과 불과 15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다. 오스만튀르크 지배 시절의 요새가 남아있는 곳으로 다소 허물어진 성벽과 성루 등이 황량한 바람이 부는 언덕의 정상과 맞물려 스산한 기분을 자아내지만 이곳에서 바라보는 네레트바 강의 풍경이 썩 괜찮아 보스니아를 끝까지 담고 싶다면 들러도 좋다. 많지 않은 가구의 민가와 마을 중심에 있는 모스크 그리고 석류 주스를 권하며 사람 좋은 웃음을 보이는 사내와 알록달록한 집시풍의 기념품을 파는 몇 군데의 노점이 있는 돌길을 오르면 이 요새 지구의 정상에 오를 수 있다. 포치텔 마을의 민가들은 모두 석조로 지어졌으며 역시 내전으로 많은 부분이 무너졌지만 거의 복구가 된 상태. 옛 보스니아 마을의 전통적인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 곳이라고도 한다. 아무렇게나 자란 풀과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돌. 요새는 군데군데 허물어져버려 아무래도 쓸쓸하고 스산한 마음이 분다.

하지만 이곳 정상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그런 작은 마음들을 잠시 뒷전으로 데리고 갈 뿐. 마을 바깥으로 네레트바 강이 아무런 소리 없이 유유히 흐르고 모스크의 첨탑은 조용히 하늘로 향해 종교적인 엄숙함마저 깃드는 곳. 포치텔은 그냥 그렇게 이곳에 있다. 마치 현재의 보스니아 사람들이 말을 아끼고 있는 것처럼.

TIP.

아직도 전쟁 당시 쓰였던 지뢰가 땅 밑 어딘가에 숨어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포치텔에서는 반드시 사람이 지나간 흔적이 있는 길로만 다녀야 한다.

 

MONTE NEGRO

몬테Monte-산네그로Negro-검은. 베네치아 사람들이 이곳에 처음 왔을 때 산이 유달리 검게 보인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 국호가 되었다. 하지만 보스니아에서 넘어와 항구도시인 티바트Tivat에 도착하자마자 가장 먼저 와 닿는 색채적 감각은 검다, 보다 파랗다, 였다. 익숙한 바다 빛 그리고 그 위에 얹힌 푸른빛. 맞다, 지중해에서 만났던 그 익숙한 블루.

 

몬테네그로식 산책, 코토르KOTOR

코토르는 티바트에서 차로 20여 분 거리에 있는 몬테네그로 최고의 관광지이다. 아드리아해 연안을 여행하는 많은 개별 여행자들은 크로아티아의 두브로브니크를 지나 조금 더 아래쪽에 위치한 이 도시를 결코 지나치지 않는다. 코토르는 중세 세르비아의 한 왕가에 의해서 지어졌다는, 전체 길이가 4.5킬로미터에 달하는 굳건한 성벽과 중세 시대의 건축물과 분위기가 잘 보존되고 있는 구시가지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성벽 정상에서는 동유럽 최고의 리아스식 해변을 감상할 수 있으며 같은 발칸 국가이며 슬라브계인 보스니아와 이웃하지만 문화와 풍습 등이 라틴계인 바다 건너 이탈리아와 조금 더 가까운 느낌이다. 코토르 항구에는 커다란 크루즈가 정박해 있고 구시가지를 감싸고 있는 요새의 성벽은 견고하며 언제나 주변은 차들의 소음으로 분주하다.

하지만 사람들의 행동은 느긋하고 여유롭다. 거친 돌산인 로부첸산으로 둘러싸여 있지만 또 바로 앞의 바다와 함께하고 있는 코토르에 온 이상 코토르식 산책은 당연한 걸음. 1555년 건축되었다는 서쪽 문을 통해 코토르 구시가지로 들어서면 드디어 코토르만이 가지고 있는 작은 세계에 들어가는 셈이다. 이 크지 않은 공간에 12세기에 건축된 성당과 1,300년대에 지어진 수많은 교회와 수도원, 많은 궁전들과 프랑스 극장 등 볼거리가 가득해 흔한 표현인 보석 상자보다는 보석 궁전에 가깝다. 세계문화유산이라는 칭호는 코토르에 주어진 너무나 당연한 왕관.

구시가지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시계탑이 보인다. 단순한 시계탑이지만 지어진지 무려 400년이 넘는 코토르의 상징과도 같은 건축물로 오른쪽으로 돌아 다시 서쪽의 문으로 나올 때 까지 현지인의 집들과 대표적인 건축물들은 물론 레스토랑과 기념품 숍, 호텔 등이 이어진다. 구시가지를 대표하는 건축물인 성 트뤼폰 성당은 1166년에 건축되었는데, 원래 809년 코토르의 수호성인이었던 성 트뤼폰을 기리기 위해 세운 옛 교회 터에 지어졌으므로 실제 건축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무려 천 년이 넘는다.

이 성당은 로마네스크와 고딕, 바로크 양식들이 혼재되어 있으며 코토르에 있는 두 개의 가톨릭 성당 중 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코토르에서 남쪽으로 아드리아 해를 면하고 있는 곳에 부드바라는 도시가 있는데 2,500년 동안 무역항으로 서유럽과 동유럽을 잇는 거점 역할을 한 탓에 아드리아 해 연안에 위치한 도시들 가운데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도시로 기록된다. 작지만 한때 바다를 호령했던 국가로서 몬테네그로에서 해양 박물관은 다른 나라의 국립박물관보다 중요한 박물관이다. 코토르의 크고 작은 행사가 열리는 성 니콜라스 정교회를 지나 성벽의 외곽에 서면 해자를 기준으로 코토르의 현재 시가지와 구시가지가 나뉘어 보인다. 현재와 과거로 다시 나누는 것은 의미가 없는 일. 모두 코토르이고 코토르가 다함께 아우르기 때문이다. 이제 코토르를 떠날 시간, 단지 시간 계산을 잘못한 탓에 성벽의 정상에 올라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아름다운 피요르드의 풍광을 보지 못한 것이 아쉬울 뿐이다. 이 마법과도 같은 코토르의 미로에 빠지지 않으려면 시간 분배를 잘 할 것. 그것이 이 코토르의 서쪽 문을 통과해 들어오면 시계탑이 바로 앞에 보이는 비밀이다.

TIP

서쪽 문으로 들어가기전 여행안내소가 있다. 한국어로 된 지도가 구비되어 있으니 지참하면 좋다.

교회 내부의 벽에는 크고 작은 은판들이 장식되어 있는데 이는 어부들이 무사항해를 기원하기 위해 스스로 징표로 만들었던 것. 그들의 소망은 그저 안전한 귀가였지만 어쩌면 그 작은 소망이 가장 절실했을 것이다.

 

성 조지섬의 슬픈 동화

1797년 나폴레옹 군대가 이곳을 점령했다. 한 병사가 아름다운 페라스트 여인과 한눈에 사랑에 빠졌지만 명령에 따라 마을을 포격하는 바람에 여인은 죽고 만다. 이를 알리지 못한 죄책감으로 병사는 프랑스로 돌아가지 않고 전쟁이 끝난 후 이곳을 다시 찾아 섬으로 들어가 평생을 속죄하며 살았다.

 

두 개의 섬 하나의 동화, 페라스트PERAST

숙소를 나와 작은 바닷가 마을 페라스트로 가는 길. 몬테네그로는 아드리아 해에 면한 작은 나라지만 산이 많고 계곡이 깊어 일부 도심구간을 제외하면 나라 이름 그대로 산악 지형인 국가이다. 유럽에서 가장 깊은 협곡인 타라 캐년Tara Canyon도 몬테네그로 북부에 있다. 굽이굽이 산길을 돌면 산 아래로 파란색의 비단에 은빛 보석을 수놓은 것 같은 바다가 펼쳐지고, 과거 15세기 초부터 이 지역을 호령하며 그 옛날 조선소가 네 곳이나 있을 정도로 번성했다는 페라스트가 모습을 보인다. 호젓한 해변 돌바닥을 따라 걷다보면 아기자기한 페라스트 마을의 모습보다는 눈앞에 산들이 마치 기웃거리듯, 보호하듯 병풍처럼 막아서고 그 앞에 차마 손으로는 다루지 못해 어쩔 줄 모르겠는 듯 두 개의 보석을 바다에 띄워 놓은 것 같은 장면이 펼쳐진다. 두 개의 섬인 성 조지St.George섬과 바위의 성모Our Lady of The Rock섬.
두 섬은 바다 한가운데에 조용히 나직이 느리게 천천히, 세상의 온갖 느림을 곁에 두고 페라스트를 꾸미고 있다. 먼저 섬으로 건너가기 전에 마을을 둘러본다. 섬은 눈앞에 언제나 있으므로 서두를 필요는 어디에도 없었다. 골목골목 배어있는 짙은 아이보리 벽의 따스한 질감과 평범한 사람들의 단순한 일상은 관광객들과 섞여도 전혀 이질감이 없고 서로 자연스럽게 동화되고 스며든다. 발칸 여행을 시작하면서부터 어디선가 느꼈던 익숙함, 두 개의 섬이 페라스트의 얼굴이라면 마을은 페라스트의 마음 속.

배를 타고 섬을 향해 바다를 건넌다. 성 조지섬은 배가 닿지 않지만 바위의 성모 섬에는 내릴 수 있다. 무척 짧은 여정이지만 분명히 푸른 아드리아 해의 물이 스며드는 곳이기에 일부러 손을 뻗어 물에 담가 보았다. 빠르게 지나쳤지만 분명히 내 손에 닿은 감촉. 아드리아해의 따스함이기에 그 기억이 깊다.

인공섬인 바위의 성모 섬은 원래 바위 한 개만 바다 위에 덩그러니 있었지만 1452년 이곳을 지나던 베네치아 어부가 바위 위에서 성화를 발견한 후 지역 주민들이 수백 년 동안 바위를 쌓아 섬을 만들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곳이다. 아직도 페라스트 주민들은 성당을 세운 날을 기념하기 위해 매년 7월 22일에 바다로 나가 돌을 던지는 행사를 한다고 한다. 섬에는 1630년에 만들어진 작은 교회가 있다. 교회 내부의 벽에는 크고 작은 은판들이 장식되어 있는데 이는 어부들이 무사항해를 기원하기 위해 스스로 징표로 만들었던 것. 그들의 소망은 그저 안전한 귀가였지만 어쩌면 그 작은 소망이 가장 절실했을 것이다. 2층의 성화와 성물들이 전시되어 있는 작은 박물관을 지나 섬 끝에 있는 작은 등대에 서면 이 섬의 여행은 끝난 셈. 작은 공간이었지만 이상하게 느리게 흘러가던 시간 그리고 딱 알맞게 주변에 머물러주던 아드리아의 바다. 햇빛을 받아 온기를 머금은 크림색의 외벽, 일부러 덧칠을 하지 않은 하늘색의 둥근 돔 그리고 주황색 지붕 아래 있었던 동화 같은 시간. 다시 배를 타고 페라스트로 돌아오는 물길. 바다 위에 잔잔하게 꽃잎처럼 떠있는 두 섬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확실히 페라스트와 아드리아로부터 사랑받고 있다고.

 

SERBIA

발칸의 역사에서 항상 중심에 섰던 나라. 세르비아. 다른 국가들과 달리 유달리 서유럽의 색채가 강하지만 도나우 강이 흐르고 발칸 산맥이 이 땅위를 지나며 무엇보다 발칸 땅 파노니안 평원의 한 가운데에 있으니 세르비아를 어찌 진정한 발칸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으랴.

 

하얀 도시, 베오그라드BELGRADE

하얀 도시라는 같은 이름을 지닌 도시는 많다. 페루의 아레끼빠, 모로코의 테투안 그리고 대부분의 스페인 남부 도시들. 베오그라드가 주는 흰색의 이미지가 궁금했다. 발칸에서 흰색이라...우선 베오그라드를 걸을 수밖에.

동유럽에서 가장 먼저 맥도널드가 들어오고 일찌감치 나이트클럽과 펍이 거리 어느 곳에나 있을 정도로 서구 문명을 일찌감치 이식한 나라,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거리를 걷다 보면 서유럽의 어느 도시에 있는 것처럼 활기와 분주함이 가득하다. 베오그라드의 도심은 보스니아나 몬테네그로의 중심거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많았고 주변은 화려했으며 다양한 브랜드의 상점은 확실히 서유럽의 모습이었다. 이들에게서는 확실히 부유함이 느껴졌다. 없는 자가 억지로 내는 것 말고 원래부터 있던 태생적 여유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나오는 자유. 17세기에 조성되어 구시가지라고 불리지만 아무래도 화려한 현대식 거리인 크네즈 미하일로바 거리를 끝까지 걸으면 칼레메그단Kalemegdan성벽과 만난다. 칼레메그단은 ‘넓은 평원의 요새’라는 뜻으로 2천여 년의 역사를 지닌 고도 베오그라드를 꽤 오랫동안 지켜주었던 곳이다. 군사적 용어인 요새에서 지금은 베오그라드 시민들의 휴식처인 공원으로 용도 변경된 칼레메그단. 도나우 강과 사바 강이 합류하는 지점의 언덕위에 자리하고 있으므로 베오그라드 시내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 요새 끝에는 기념비가 하나 서 있는데 바로 베오그라드의 상징인 ‘승전기념비’. 14미터 높이의 이 상은 한 손에 검을, 다른 한 손에는 비둘기를 들고 있다. 이 땅에서 전쟁이 더 이상 벌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바람. 베오그라드가 주는 흰색은 결국 평화의 색이었다. 동상 너머 도나우 강이 펼쳐지면 어느덧 당신과 나의 거리만큼 멀게만 느껴졌던 베오그라드가 성큼 다가오는 순간. 이제 우리는 어느덧 다시 가까워졌다.

 

세르비아 횡단 열차, 모크라 고라MOKRA GORA

비타시 마을에서 모크라 고라 마을까지 이어지는 협궤 열차. 과거에는 보스니아까지 국경을 넘어 달리던 발칸 횡단 열차였으나 보스니아 내전 때 파괴되어 중단됐다가 현재 지역 주민들의 노력으로 일부 구간이 재개통되어 관광 열차로 운행되고 있다. 하늘에서 보면 열차 레일의 궤적이 숫자 8처럼 보인다고 해서 사르간 에잇Šargan Eight-Number 8이라고도 부르는 모크라 고라. 모크라 고라는 ‘젖은 산’이라는 뜻이다. 열차는 마을을 떠나 곧장 산속 계곡으로 난 길을 따라 아직 채 떨어지지 않은 단풍과 구석에 얼어있는 얼음덩이를 지나며 남서쪽으로 달린다.

경북 봉화에서 강원도의 태백까지 외진 산간을 달리는 눈꽃 열차와 거의 흡사한 느낌. 그때도 좋았으니 같은 상황이라면 지금도 좋지 않을 이유가 없다. 마침 세르비아의 한 고교에서 수학여행을 온 탓에 열차 안은 뜻하지 않게 부쩍 소란스러워졌다. 옆자리의 승객은 이스라엘에서 온 노부부. 여행자들과 학생이라는, 낯선 시선과 익숙지 않은 환경은 금세 밝은 분위기로 바뀌고 이내 고등학생들은 그들만의 나이로 돌아가, 내부는 기차가 달리는 속도만큼 빠르게 변한다. 간단한 영어 몇 마디만으로도 충분했던 세르비아 고교생들과의 한 때. 서로 악수를 하고 헤어질 때, 묘한 감정이 스미고 그것은 바로 기차가 가지고 있는 정서와 맞닿는다. ‘8’, 돌고 돌아 다시 만나는 모든 것들. 그들과 나, 보스니아와 세르비아 그리고 나와 발칸.

 

집시의 시간, 드르벤그라드DRVENGRAD

영화 <집시의 시간>. 보스니아 출신의 감독 에밀 쿠스트리차가 빚어낸 이 영화는 예전 유고 땅에서 흘러간 발칸 사람들의 애환과 사랑을 그린 영화로 1989년 칸에서 감독상을 받았다. 쿠스트리차는 사라예보의 무슬림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개종 후 세르비아로 건너갔고‘사랑은 기적’이라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 이 영화적 공간인 드르벤그라드를 지었다. 보스니아를 여행하다가 만난 한 보스니안은 자신의 땅에서 나고 자란 쿠스트리차가 자신들에게 총을 겨누었던 세르비아로 넘어가 살고 있는 것에 대해 조금은 쓸쓸한 얼굴로 가로저었다. ‘나무로 지어진 마을’이라는 뜻의 드르벤그라드. 우든 타운이라고도 불리며 영화가 철수한 이후에는 퀴스텐도르프üstendorf라는 이름의 리조트로도 함께 운영되고 있지만 쿠스트리차는 이곳이 자신의 삶과 영화가 완성되는 곳이라며 최초의 형태를 유지시키고 있다. 거리에는 페데리코 펠리니와 잉그마르 베르히만, 압바스 키에로스타미 같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거장들의 이름이 부여됐으며 얼마 전 타계한 스탠리 큐브릭의 이름이 붙은 영화관도 있다. 드르벤그라드에서는 2008년 이후 매년 퀴스텐도르프 영화제와 뮤직 페스티벌을 열고 있는데 레드 카펫을 깔지 않고 할리우드에서 나오는 영화 소품을 전혀 쓰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우든 타운 중심에 역시 세르비아 정교회의 성인인 성 사바의 이름이 붙여진 자그마한 성당이 있다.

 

오플레나츠 교회OPLENAC

베오그라드에서 남쪽으로 한 시간여. 성 조지 교회St. George’s Church는 세르비아 전체를 통 틀어서, 아니 어쩌면 전 유럽의 유수한 교회나 유명한 성당들과 비교해도 전혀 밀리지 않는 지극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는 곳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오플레나츠Oplenac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는 이 교회는 1910년에 세워졌으며 세르비아의 국보격인 ‘Cultural Monuments of Exceptional Importance’로 지정돼 국가적으로 보호받고 있다. 대대로 세르비아를 이끌었던 로열패밀리 가문의 영묘로도 쓰이고 있는 이 교회는 토폴라 마을 언덕 정상 한적한 나무숲을 따라 올라가면 만날 수 있다. 단순한 회백색의 외관에 평범한 다섯 개의 푸른 돔을 이고 단정하게 서있는 오플레나츠. 수수하고 말쑥한 차림은 우선 왕가의 이미지와는 조금 멀다. 작게 열린 교회의 나무문으로 들어서면 이제 한적한 나무숲을 통과하고 언덕에 올라 갑자기 나타난 마법의 세계로 들어온 셈. 내부에서 펼쳐지는 화려한 성화와 갖가지 조명으로 음영을 달리하는 모자이크 타일은 이곳이 잠시 세르비아가 아닌 하나의 완전히 다른 장소로 옮겨져 온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모자이크는 빛을 받아 색을 입고 또 그 색을 다시 반사해 다른 모자이크에 다각도로 영향을 끼친다. 빛의 난반사, 이 빛의 아름답고 어지러운 난투에 잠시 왕가의 무덤이라는 생각이 사라진다. 화려한 모자이크 극장은 지하까지 이어지고 실로 이런 신비한 아름다움 속이라면 기꺼이 이곳에 갇혀도 좋겠다는 환상마저 드는 곳. 분명한 것은 발칸의 최고 지점은 바로 이곳이라는 것이다.

 

밀레세바 수도원MILEŠEVA

밀레세바 강이 조심스럽게 흐르고 있는, 몬테네그로 국경과 불과 25킬로미터 떨어진 곳. 모든 세르비아 정교인들에게 절대적으로 성스러운 장소이며 정신적인 중심지로 여겨지는 밀레세바 수도원이 있다. 베오그라드 시내 중심에 있는 성 사바 성당의 주인공인 성 사바의 유해가 최초로 안치되었던 곳. 중앙에 위치한 수도원 본당 내부에는 세르비아의 국보로 여겨지는 두 가지 미술품, 예수의 관에 앉아 있는 ‘White Angel’과 성 사바의 생애가 그려진 프레스코화가 있지만 아쉽게도 내부 사정으로 보지는 못했다. 내부는 엄격하게 사진촬영을 제한하고 있다.

 

고요한 도시, 노비 사드NOVISAD

노비 사드. 헝가리와 인접한 탓에 상대적으로 많은 헝가리안들이 살고 있으며 몬테네그로가 독립하기 전 몬테네그로 공화국으로 남아있을 당시 역시 헝가리계의 보이보디나 자치공화국이었던 곳이다, 세르비아의 두 번째 도시로 베오그라드보다 삶의 질이 부유하다고 평가받는 도시. 베오그라드가 세련되고 남성적이며 빠르게 분주하다면 노비 사드는 우아하고 여성적이며 분주하지만 그 속도는 느리다. 그래서 세르비아 사람들은 노비 사드를 고요한 도시라고 부른다. 노비 사드의 중심지인 슬로보데 광장은 베오그라드보다 훨씬 유럽적이고 시청과 세르비아 정교회 그리고 가톨릭계인 성 마리아 성당과 유대인 시나고그 등 많은 종교적인 건물들이 있는 곳으로 이곳에서부터 여러 갈래 골목으로 이어진 노비 사드 속을 걷는 것이야말로 노비 사드를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 발칸이 조금은 위험하지 않을까 우려했던 모든 이들에게 이곳처럼 안전한 곳이 어디 있냐고 되묻고 싶은 공간이다.

베오그라드의 칼레메그단과 마찬가지로 노비 사드 역시 요새가 도시를 지켜주고 있는데 페트로바라딘Petrovaradin이 바로 그것이다. 현재 전 유럽에 남아 있는 가장 크고 완벽한 요새 체계로 이곳을 기준으로 도나우 강이 양옆으로 흐르고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로 나뉜다. 다리를 건너 강 아래에서 바라다보면 아름다운 풍광으로 마치 요새가 물 위에 떠 있는 섬처럼 보인다. 지중해의 이베리아 반도 끝에 있으며 아름다운 암벽으로 유명한 영국령, 지브롤터. 페트로바라딘은 발칸의 지브롤터라는 애칭을 가지고 있다. 매년 페트로바라딘 에서 개최되는 EXIT Music Festival은 유럽 전체에서 가장 열광적인 음악 축제로 이 시기 노비 사드에는 세상 어느 곳보다 많은 사람이 몰린다. 고요한 도시와 더불어 이곳을 문화의 도시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교육과 와인의 도시, 스렘스키 카를로브시SREMSKI KARLOVCI

다시 베오그라드로 돌아오는 중간 즈음, 바로크 타운이라 불리는 스렘스키 카를로브시 도시에 들린다. 마을 한 가운데의 건물은 세르비아 정교회 건물로 카를로브시는 정교회 업무가 베오그라드로 이관되기 전까지 많은 부분에서 정교회를 대표했던 도시였다. 그리 크지 않은 타운에는 1792년에 세르비아에 최초로 세워진 김나지움Gymnasium이 있는데 바로크 타운과 더불어 카를로브시를 교육의 도시로 부르는 까닭이다. 5개국의 언어는 기본이며, 많을 경우 최고 무려 8개국의 언어를 구사할 수 있다고 하는 이 학교의 학생들. 세르비아의, 발칸에서의 저력이란 이런 곳에서 나오는 것일 터이다. 카를로브시에 들리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이 주변으로 많은 와이너리가 있다는 것. 타운 거리에는 누구나 와인을 받아 갈 수 있게 시민용 와인 드럼통이 있을 정도이다. 한때 이 백 여개의 와인 생산지가 있었고 지금은 50여 개로 줄어들었지만, 한때 세르비아의 와인과 세르비아 정교회를 책임졌던 카를로브시. 어쩌면 노비 사드보다 더 고요한 도시.

 

비밀의 수도원, 노보 호포보NOVO HOPOVO

세르비아 북부의 거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거대한 프루스카 고라 산맥 아래에 있는 정교회 수도원. 세워진 시기는 불분명하며 본당 내부에 수백 년 동안 보존되고 있는 프레스코화로 유명하다. 세르비아 국보 중 하나로 관리되고 있기에 내부의 사진 촬영은 금물이다. 본당 구석에 다른 프레스코 성화들과는 이질적인 유달리 특이한 그림이 하나 있는데, 미술 역사상 가장 독특한 화풍과 베일에 싸인 화가 중 한 사람으로 간주되는 히로니뮈스 보스Hieronymus Bosch와 아주 유사한 화풍의 벽화가 그것이다. 네덜란드인인 그가 언제 이 먼 곳까지 와서 몰래 그림을 그리고 갔을까 하는 의문은 김홍도가 홀연히 사라진 후 일본으로 건너갔던 것과 비틀스가 몰래 캐나다로 넘어가 역시 의문의 Klaatu라는 밴드를 만들었을 것이라는 추측으로 연결되는 신기함으로 이어진다.

 

Balkan's Drink

발칸의 음식은 서로 다른 듯 비슷한 듯, 어떤 면에서는 같고 또 어떤 면에서는 확연히 다르다. 구분하자면 보스니아는 발칸적, 몬테네그로는 아드리아해적 그리고 세르비아는 세르비아적.

발칸의 전통주 라끼아RAKIA

발칸 지역의 전통주인 라끼아는 곡주이자 무색의 백주로 파인애플과 모과, 자두와 청포도 등 다양한 과실로 만들어진다. 도수가 높지만 뒷맛이 깔끔하고 소화력이 좋아 발칸 사람들이 사랑하는 대표적인 술로 통한다. 레스토랑 어느 곳에서도 주문이 가능하다.

보스니아의 생수 오아자OAZA

깨끗하고 맑은 물이 넘치는 보스니아에서는 물을 맛보는 것도 꼭 해야 할 일, 보스니아를 대표하는 단순한 생수지만 그 청량감과 시원함은 잊을 수 없다. 백악관에 납품되는 생수라니. 그것으로 설명은 끝.

세르비아 와인

세르비아는 유럽 와인 강국 중 하나이다. 스렘스키 카를로부시가 대표적인 와이너리 밀집 지역으로 100여 년 전 까지만 해도 이 지역의 골목골목은 부티크 와이너리와 와인을 빚는 수도원으로 넘쳤다고 한다. 세르비아 출신으로 세계 최고의 테니스 스타인 조코비치가 세르비아 와인의 명성을 되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중이라는 후문이다.

 

Balkan's RESTAURANT

보스니아 코바세비치Kovacevici

보스니아는 이슬람 국가이기 때문에 돼지고기를 금하는 편이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양고기 요리가 발달을 했는데 보스니안의 성품대로 느끼하지 않고 담백한 맛을 보여준다. 코니츠에서 가까운 자블라니카 호수 근처의 코바세비치 레스토랑은 보스니아 양고기 바비큐의 정수를 보여주는 곳.

몬테네그로 트르페자Trpeza

몬테네그로는 이탈리아와 바다 건너 인접해 있기 때문에 생선 요리가 많고 이탈리아 요리를 많이 닮았으며 디저트 문화도 발달해 있다. 코토르 성내의 트르페자에서 즐기는 전채와 메인 그리고 디저트로 이어지는 심플한 코스는 그리 과한 가격이 아니니 즐겨보는 것도 몬테네그로 여행 중 하나일 것.

세르비아 아쿠아 도리아Aqua Doria

세 나라 중 세르비아가 가장 음식이 훌륭하다는 데에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아마 다른 민족들과의 잦은 교류로 음식문화가 다양하게 녹아진 터. 노비사드 페트로바라딘 요새 아래에 위치한 아쿠아 도리아에서 맛보는 생선 수프는 매운탕과 너무나 흡사해 발칸 여행 중 한국음식에 대한 향수를 달래줄 수 있는 유일한 곳이기도 하다.

 

INFORMATION

항공

발칸으로 가기 위해서는 터키 이스탄불을 경유하는 편이 가장 빠르다.

인천-이스탄불 항공 스케줄(*2017년 1월 기준)

- ICN - IST / IST - ICN(주 11회 운항)
- 구간 ICN - IST
- 요일 매일 / 월/금/토/일
- 출발 ICN 00:40 / 12:30
- 도착 IST 05:15 / 17:55
- 구간 IST - ICN
- 요일 매일 / 목/금/토/일
- 출발 IST 01:25 / 17:50
- 도착 ICN 18:25 / 11:00+1

비자

우리나라와 발칸 3국 사이에 비자면제협정이 체결되어 있어 무비자로 90일간 체류 가능.

언어

보스니아는 세르보-크로아티아어를, 몬테네그로와 세르비아에서는 세르비아어를 쓴다. 주요 관광지에서는 영어가 통용되나 이외의 곳에서는 거의 쓰이지는 않는 편.

전압

3국 220v 공통.

화폐

보스니아는 마르카Marka, 몬테네그로는 유로Euro, 세르비아는 디나르Dinar를 쓴다.

치안

발칸에 대한 우려 섞인 시선이 있지만 치안은 안전한 편이다. 발칸 지역에서는 예로부터 대문을 잠그지 않고 살았다고 한다.

인터넷

일부 산악 지역을 제외하면 환경은 나쁘지 않다. 호텔 등의 숙박시설에서도 대부분 Wi-Fi가 가능하다.

국경통과

국가 간의 국경을 육로로 넘는 것에는 언제나 묘한 긴장감이 있기 마련. 지시에 잘 따르면 별 다른 문제없이 통과가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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